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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이고 극적인 언어의 밸브
변희수 시집, 『아무것도 아닌, 모든』(서정시학, 2018)
글_ 임창아 시인,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강사
언어의 추진력은 언어에 심취되고 도취될 때 발생한다. 시니피앙(기표)으로부터 도취되고 시니피에(기의)로부터 심취되어 언어의 폭은 ‘넘어섬’의 경지에 이른다. 도달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작동되어야 추진력을 갖는다.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언어들이 부정과 긍정으로 변주되면서 차츰 감정의 폭을 확장해 나가고 결국 ‘모든’으로 귀결된다.
이와 같이 적극적 언어들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극적인 시세계로 전환된다. 시인은 언어들과 모종의 거래가 있는 게 분명하다. 언어를 앞세워 이리저리 조종한다. 미세먼지처럼 아주 흔한 단어의 궁리만으로도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을 보여 주는, 변희수 시인의 첫 시집에게 경의를 표한다.
극적효과를 위해 시인의 언어들은 자꾸 “옆”을 가지려고 한다. 심심하면 언어의 옆구리를 찌르고 달아나고 장난치고 서성거리며 능청을 떤다. 언어수위를 조종하고 조절하는 센서의 탁월한 성능이 궁금하다.
시의 운율에 대해 발레리는 ‘산문은 보행이요, 시는 춤이다’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녀의 언어들은 ‘춤의 언어’로써 독자를 유혹한다. 언어의 동작은 섬세하고 유연하다. 한 편의 시는 반복과 리듬으로 완성되고, 세상 모든 단어들은 춤의 동작으로 끝없이 재생되면서 의미를 생산한다.
변희수 시집, 『아무것도 아닌, 모든』(서정시학, 2018)
어느 늦은 오후, 그녀와 머리를 맛 대고 이른 저녁을 먹었다. “우리는 아직 이 부분에 속해 있으니까/이 부분을 오래 들여다보며” (‘이부분’) 구조화되고 패턴화된 시집에 대해 묻자, 그녀는 무수한 과정들이 있었지만 그 과정들을 걸러내고 가장 엑기스적인 시들만 묶은 결과물이라고 했다. 당연하지만 글쓰기는 치약이나 약재처럼 대상의 의미(엑기스)를 남김없이 끌어내야(짜내야)한다. 절박하게 간절하게 달라붙어 적극적으로 쥐어짜야(끌어내야) 극적인 시가 탄생한다. 그녀에게 ‘아무 것도 아닌, 모든 것’은 시였다. 첫 시집의 자세가 누구나 그렇듯, 가장 윗 단계만 걸러서 시집으로 묶은 지난한 마음들이 스쳐간다.
흰자 위에 동동 떠 있는/노른자 같은 마음아/노른자를 둘러싸고 있는/흰자 같은 마음아/둘인 듯 하나인 듯 나누어지는 두 개의//마음이 마음을 품어 다시 한마음이 생기려 할 때/무정한 마음이 다시 유정해지려 할 떄/꼬꼬댁꼬꼬댁 붐비는 나의 마음아//팔도 날개도 아닌 것이 돋아/잠시 마음이 마음대로 푸드덕 날아오르려고 할 때//마음아 회를 치고 일어서는 마음아/구구구 어디론가 몰려가고 있는 어린 마음아/쏟아지는 목청에 겨워 멀리서도 꼬끼오 우는 마음아//낳지도 않은 내 마음들이/오지도 않은 새벽을 향해 한발 두발 갸웃갸웃//콕콕 쪼아대고 싶은 정곡아
-「금방 낳은 달걀처럼 마음이 생기려 할 때」전문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고 했다. 시인은 마음을 얻으려면 적어도 계란보단 “더 개방적이어야” (‘우리가 접시꽃을 감상할 때’) 한다고 하면서, “유정해”진다고 말한다. 아무 것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는 시/삶/죽음 같은 계란과 마음이 있다. 여리고, 깨지고, 곪고, 구린내 나는 치명적인 계란이 시/삶/죽음을 환기시킨다.
“금방 낳은 달걀” 속에는 ‘흰자’와 ‘노른자’ 2개의 마음이 있다. 우리는 가끔 사랑하는 사람에게 ‘네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마음이 내포하는 공백들, 때로는 극적이고 적극적인 균열들, 어떤 게 진짜이고 어떤 게 가짜이건 즐겁게 편집(編輯)되어 “꼬꼬댁” 거리는 증상들, 과 마주한다.
시집 전체의 작품 한 편 한 편이 가지런한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 “언제라는 말에 슬쩍 기댄” (‘언제는 언제나 우리 앞을 지나가고’) 흐름과 구조가 가지런하다. 한 주제를 앞세우면 그 주제에 맞는 ‘입술을 모아’ 잠자리 곁눈을 가진다. 굳이 시선을 멀리 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혀처럼 출렁거리는 것” (‘각자의 블루’)이 있어도 앞과 뒤와 옆만 본다. 제자리에 앉아서 “밝아오는 세계에 대해”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갈 곳이 없어 꽃” (‘생활’)이 피어도 애정과 애증이 결합한다. 병렬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면서 옆의 언어와 연대한다. 그러나 “거울은 조금 재수 없다” (‘당연한 거울’)고 생각하면서
당신은 추파라는 말이 좋다고 했다/가을秋, 물결波/그동안 추파에 대한 오해가 깊었다/추파를 던진다는 건/마음이 물결처럼 한 번 인다는 것/그러니까 이쪽 물결이 저쪽 물결에게/두둥실 마음이 서는 것이 추고/넘쳐서 출렁대는 것이 파다/그런데 아무리 곱씹어 봐도/이 추파라는 말은 금방 적응이 안 된다/마음이 마음에게 거는 수작처럼/수군거리는 데가 있고/손발이 오그라든다/내가 추파에서 먼 것은/수심이 얕고 파랑이 깊지 못해서겠지만”
-「추파 읽는 저녁」부분

저수지에 돌을 던진다는 건 “추파를 던”지는 일, ‘출렁’, ‘물결’, ‘파랑’의 언어들이 어디까지 번지는가를 지켜보는 일이다. “나도 모르는 눈물이/다정하게 번졌으면 좋겠다”는 ‘시인의 말’을 떠올려보면 이 번짐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아무리 입을 꾹꾹 털어 막아도” 새어 나오는 웃음을 울음으로 견디며, 시인은 저수지에게 ‘수작’을 걸고 돌에게 시의 ‘추파를 읽어’ 내라고 한다. 秋波의 궤도를 추적하기에는 아무래도 ‘가을’이 좋다. 그녀는 이렇듯 끈질긴 추적자다.

앞서 말했듯, 시의 추진력은 언어를 밀고나가는 것이고, 언어에 딸려가는 것이고, 고의적인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랭보의 말처럼 시는 ‘생각한다가 아닌 나는 생각되어진다’ 고로 그녀는 생각되어지기 위해 견자의 포즈를 취한다. 견자는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미지로 도달하는 습관이 있다, “밥솥을 품고 가는 사람의 뒤를/말없이 졸졸 따라가”(‘반복’)는 언어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세계다. “방에 들어와서 방을 까맣게 잊어버” (‘좁은 방’)리기도 하지만, 즉 이것은 언어의 본질을 구체화하기 위한 일종의 ‘포즈’다. 포즈의 옆에는 진지성과 일관성이 딱 달라 붙어있다. 그렇지 않으면 시의 포즈는 엉성해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생도 포즈고 사랑도 크게는 포즈다. 현상에 머무는 포즈가 아니라 스타일을 관통하여 틈만 나면 “아무 것도 아닌, 모든”것을 위해 “자꾸 옆을 가지려”는 포즈다. “먼저 생긴 옆과 나중 생긴 옆에 대해서 이미 옆이 된 것”(‘옆은 자꾸 옆을 가지려 하지’)처럼,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말놀이에서 발생되는 뭔가를 찾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 역시 ‘추파에 대한 오해’가 깊어서겠지만,

“강변의 오해란 물이 닿는 순간의 불, 불이 닿는 순간의 물처럼 반짝임 외에 아무 것도 아니지만, 오해다 오해의 구두를 신고 당신과 내가 반짝하고 (중략)반쪽처럼, 반짝 웃는다”
-「착시」부분
곳곳에서 “반짝, 웃는” 초월과 달관의 언술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다만 오해가 개입되기 전까지만, 언뜻 보면 단순한 말놀이 같지만 그 안에서 파생되고 딸려 나와 보푸라기처럼 일어나는 게 있다. 말놀이는 밑천 덜 들이고 하는 최고의 장사인 셈인데, 장사와는 거리가 멀고 셈과는 더더욱 거리가 먼 시인은 언어의 사업에 기민하고 예리한 ‘촉’을 갖고 있다.
그렇다 해도, 여기에는 한계가 있어 고통과 절망이 따른다. 감히 고통이 모자란다고 가끔은 절필을 운운하지만 그럴수록 시는 더 그리워지고 간절해진다. 이렇듯 시인은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매번 시의 자리를 더듬는다. “검정의 반대편에서 검정을 생각해” (‘검정의 감정’) 이러한 감정을 되풀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시인의 숙명이다. 언제나 고통과 절망과 실패의 연속이어서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다. 마음을 놓는 것도 좋고, 놓을 수 없는 마음이 있다는 것도 좋다. 그러니까 시인은 어쩔 수 없이 언어에 종사자하는 자다.
대체로 그렇듯, 단어를 변주하는 글쓰기 방식은 작가라면 누구나 거쳐 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이 글쓰기의 지름길이란 걸 영리한 그녀가 모를 리 없다. “자세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의자가 있는 골목’)
“저 돌 지독한 몽상파 육체를 가졌다//끓어오르는 한 때를 가지지 않았다면/저렇게 줄기차게 몽상하는 자세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뒹굴어도 멀리 차 버려도 한결같은 자세다/눈도 귀도 다 지워버린 자만이 들 수 있는 경계//돌은 물질이 어떻게 정신을 가질 수 있는지/정신이 어떻게 물질의 자세가 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것”
-「몽상가 타입」부분
‘지독한 몽상’을 통하지 않고서는 언어의 심층에 도달할 수 없다. 언어의 심층으로 내려가는 길은 누구나 다르고 누구나 같다. 그러나 시에 대한 “끓어오르는” 열망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 오래된 밥집을 지나 어떤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돌처럼 몽상파 육체를 가져야 한다. ‘눈’과 ‘귀’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지고지순해야한다. 재치와 끼 혹은 언어에 대한 안목을 가지고 있지 않은 몽상은 망상이다. 눈치 챘겠지만, 단어를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변희수 시인의 집중력과 에너지는 정말이지 놀랍다.
표현주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림은 나를 흥분시킨다기보다는 내 안의 모든 감각의 밸브를 열어줌으로써 나로 하여금 보다 격렬하게 삶으로 되돌아가게 만든다”라고 했다. 변희수를 베이컨식으로 표현하자면 ‘세상 모든 언어의 밸브를 열어주는 시인’이라고 명명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