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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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_인터뷰
무용에서 피고 진 꽃답던 사람
인터뷰이_김선영 대구가톨릭대학교 현대무용 강사 및 무용가
인터뷰어_ 김보람 월간대구문화 기자
대구와 서울을 중심으로 대학에서 후학 양성과 창작 활동을 동시에 전개하며 1980년대 한국 춤의 르네상스를 꽃피운 대표적인 인물 (故)김소라(1957~2010). 우리나라 1세대 남성 무용가로 한국 현대무용의 개념을 정립한 최초의 인물 김상규와 무용가 최원경의 사이의 유일한 딸이기도 하다. 미국과 유럽에서 유학하며 이사도라 덩컨, 마사 그레이엄 등의 영향을 받은 그는 서정적인 분위기를 중심으로 정적이면서도 에너지 넘치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해 수많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53세의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의 곁에는 그의 작품을 함께 해온 제자들이 있었다. 이들이 주축이 된 ‘추모 무용제'(2011)에는 1987년부터 그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가족처럼 지내온 제자 김선영 씨도 함께했다. 선생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김선영 씨. 김 씨를 만나 그가 경험한 ‘인간 김소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소라의 제자 김선영 씨는 “선생님은 무용에 모든 것을 던진 삶을 사셨습니다”라고 말했다.
Q. 안녕하세요.  선생님은 김소라 교수님의 작품에 줄곧 출연하며 가장 가깝게 지내신 제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시던데요. 두 분은 어떻게 인연을 맺으시게 되었나요?
김선영 : 제가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면서 김소라 교수님의 모친인 최원경 선생님께 무용을 배우게 됐습니다. 이후 김소라 교수님이 지도하고 계신 대구가톨릭대학교 무용과에 입학하게 되면서 깊게 인연을 맺게 됐죠. 너무나 순수하시고, 소녀 같으셔서 제자들과도 친언니처럼 가깝게 지냈죠. 그중에서도 교수님처럼 언니, 고모들이 다 무용을 한 ‘무용 집안’ 사람이었던 제게 동질감을 느끼셔서 남들에게 말 못 할 사적인 속내도 많이 터놓으셨던 것 같아요.
Q. 김소라 교수님은 지역의 무용학과를 체육이나 인문대학으로부터 분리하려는 노력 등 교육 쪽에서도 굵직한 활동을 이어가셨는데요. 학교에서의 김소라 교수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김선영 : 교수님이 대학에 처음 부임했던 게 1983년인데, 그때 겨우 30대 중반이셨어요. 그만큼 젊은 교수는 국내에 잘 없었죠.
교수님은 아침 7시부터 매일 전 학년을 대상으로 레슨을 여셨습니다. 오로지 순수한 열정으로 만든 ‘번외 수업’이었죠. 첫차를 타고 부리나케 교실에 도착하면, 교수님은 몸을 다 푼 상태로 연습복 차림을 하시고는 ‘잼버’라는 북을 오른팔에 낀 채 항상 학생들을 기다리고 계셨어요. 그리고 대학의 모든 수업이 끝나면 6시부터 10시까지 또 공연 연습을 시작했죠.
교수님은 개인 생활이라고는 정말 하나도 없었어요.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 모든 것을 하루도 빠짐없이 하셨는데, 이것은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도 그럴 것이 수업마다 모든 동작을 직접 시범을 보이면서 가르치셨거든요. 거기다 학생들의 몸을 일일이 손으로 만져가며 교정도 해주셨지요. 물론 저도 지금 무용을 가르치고 있지만, 하면 할수록 교수님 같은 스승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습니다.

1997년 7월 소라댄스앙상블 공연장면(왼쪽) / 2000년 <대구문화> 발췌_김소라 현대춤 20년 기념 공연
Q. 김소라 교수님은 1980년 중반 미국 뉴욕이나 영국, 파리 등 해외 유수 학교와 아카데미에서 수학하셔서, 가르침 역시 특별했을 것 같습니다.
김선영 : 그렇죠. 그중에서도 선생님께서 특히 강조하신 것은 ‘호흡’입니다. 안무 작품 역시 모두 ‘호흡’과 맞닿아있어요. 신체의 기본이 수축과 이완이기 때문에 호흡으로 동작을 맞추면 무용수 모두가 통일된 움직임을 구사할 수 있었죠.
또 삶 자체가 가르침인 분이셨어요. 마치 스님 같으셨거든요. 아침에 일어나시면 늘 향을 키고 명상을 하셨고, 자연을 벗 삼아 사색도 즐겨 하셨어요. M.T를 가서도 가부좌하고 앉으셔서 기도하시던 모습이 생생해요. 그것은 무용가로서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자 안무를 구상하는 과정이기도 했죠. 이를 바탕으로 한 교수님의 작품은 기교적인 동작보다는 예술성이 극히 강조된 무대로 자리 잡은 것 같아요. 그렇게 수행하듯 살아내셨기에 자신의 춤에도 남다른 에너지가 있었고요.
Q. 그러고 보니 김소라 교수님 작품은 종교관을 바탕으로 한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용의 기원이 종교에서 출발한 것이었다는 점에 있어서 본질에 매우 충실한 춤이었던 것 같은데요. 작품에 대한 태도도 남다르셨을 것 같아요.
김선영 : 교수님은 아버지인 김상규 선생님과 같이 독실한 원불교 신자였습니다. 초창기 작품 <연>(1981)부터 종교적 색채가 진하게 드러나는데 주제는 물론, 둥근 형태의 무대 세트나 ‘향’을 소품으로 쓰는 것도 전부 그와 관련된 거예요. 김소라 스타일의 무용은 ‘부드러움 속에 강인함’으로 요약되는데, 작품들은 여성스럽고 소녀 같은 품성을 지녔지만,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무용에 대한 열정이 있었던 자신과 무척이나 닮았어요.
또, 매 작품 직접 무대에 올라 춤을 추셨다는 것이 교수님 작품의 트레이드마크였죠. 현대무용 무대에서 10분~20분간 솔로로 무대를 채운다는 것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인데, 그것을 돌아가시기 전까지 줄곧 해내셨죠.
게다가 연습 때도 동작의 느낌, 분위기, 호흡 무엇 하나 달라지는 것이 없이 완벽하게 표현하셨어요. 안무 동작 하나하나에 확고한 생각과 확신이 있었다는 뜻이겠죠.

1986년 8월 <대구문화> 문화산책 발췌_현대무용단 시리우스
Q. 1980년대는 ‘한국 춤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던 때이기도 한데요. 특히 전국적으로 대구 현대무용이 굉장한 주목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김소라 교수님을 빼놓을 수 없죠?
김선영 : 그렇죠. 워낙 많은 작품을 발표를 많이 발표 하셨으니까요. 당시 교수님은 대구시민회관과 문화예술회관을 중심으로 작품 발표를 하셨는데, ‘대구 춤 페스티벌’, ‘국제 현대무용제’ 등 대구의 큰 경연 무대에는 빠짐없이 신작을 출품하셨어요. 또, 매년 대형 공연 한 편씩을 안무하셨는데 그런 작품은 서울에서도 꼬박꼬박 선을 보이곤 하셨죠. 아르코예술극장과 대학로가 주 무대였어요.
전국 대학 무용팀이 모이는 ‘생생무용제’와 ‘서울국제무용제’에는 늘 우리와 함께 나가고 싶어 하셨어요. <새>(1984)부터 <시간의 얼굴>(2006), (2008) 등 근작까지 수많은 작품이 주목을 받았죠. 교수님은 어디에 가든 늘 자신감에 차 있었고, 무대 경험을 통해 저희에게 자부심을 심어주시기도 했어요.
저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원 다니기 전까지 교수님의 작품을 함께 했고, 이후에는 ‘소라댄스앙상블’에서 안무도 맡게 됐어요. 1989년부터 만들어진 이 단체는 대학원생이나 졸업생들에게 안무 기회를 주기 위해 세워진 그룹이었습니다. 또 재학생들 주축으로 한 ‘시리우스’도 창단하셨는데, 이 같은 그룹을 통해 신인 무용가들이 더 쉽게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고 생각해요.
Q. 들어보니, 김소라 교수님은 열정은 물론이고, 삶 자체가 무용으로 가득하셨네요.
김선영 : 네. 어쩔 때는 너무 무용 밖에 모르셔서 답답하기도 했어요. 교수님께서는 시간뿐만 아니라 재정까지 모두 무용에 쏟으셨거든요. 매일 연습 전에는 20명 넘는 학생들의 끼니를 직접 사비로 챙기셨고, 세종대학교 남학생들을 자신의 돈으로 섭외해 여대에서는 잘 없었던 듀엣 무대를 교육하기도 하셨죠. 이뿐만 아니라 교수님은 거의 모든 공연을 자비로 만드신 무대에요. 대관은 물론, 세트, 의상까지 전부요. 사실, 무용 말고는 관심이 없으셔서 지원금 같은 것에 밝지 않기도 했고요.
한 번은 “이 공연만 하고 당분간 못할 거 같아. 이번 공연 때문에 대출을 많이 해서… …. 내년을 기약해야지.”라며 너무 아쉬워하시는 거예요. 그러다 돈이 생기면 무조건 공연에 투자하시기를 반복하셨죠. 다른 것을 위해 쓰는 것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인지 누구보다 강한 애착으로 무대를 준비하셨고, 한 번 올라간 무대는 몇 해 동안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초청 공연을 펼치기도 했어요.
1993년 12월 <대구문화> 예술인가족탐방 발췌_최원경 김소라 모녀
Q. 그런 점은 예술적인 면모가 누구보다 강했다는 것으로도 들립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인 김상규 선생님과 어머니 최원경 선생님 모두 대구 무용사에 빠질 수 없는 무용가이지 않습니까. 김소라 교수님에게 부모님의 존재는 더욱 특별했을 것 같네요.
김선영 : 교수님께서는 가족과 함께 지냈던 부산과 안동에서의 삶을 자주 그리워하곤 했어요. 김상규 선생님은 무섭고 완고한 분으로 기억하지만, 딸에게만은 굉장한 사랑을 주셨죠. 3남매 중 유일하게 무용의 길로 들어선 혈육이니까요. 처음에는 극구 말리셨다고 했지만, 이후에는 ‘딸 일이라면 열일 마다하고 나선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크게 지지해주셨죠.
어머니에 대한 애정 역시 지극했어요. 사실 무용의 길로 접어든 것도 최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고 하더라고요. 김소라 교수님은 공연을 보러 자주 서울에 올라가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와 동행하셨어요. 어머니이자 스승이자 소울 메이트인 셈이죠. 어머니께 바치는 작품도 다수 발표하셨는데, 특히 1992년 12월에 선보인 <사모곡>에서는 특별히 최원경 선생님과 함께 무대에서 무대에서 화제가 됐죠.
1993년 12월 <대구문화> 예술인가족탐방 발췌_어린시절 김소라(왼쪽), 1992년 12월호 <대구문화> 인터뷰 발췌_김소라
Q. 이렇게 활발하게 활동하시던 김소라 교수님이 급성 백혈병으로 투병하게 되셨습니다. 그 2년간의 투병 시간이 굉장히 본인에게는 길었을 것 같네요.
김선영 : 언제부턴가 감기가 잘 안 낫는다고 하시더라고요. 진찰을 받으러 갔는데 그길로 바로 응급실로 이송된 거예요. 이후 서울로 옮겨 치료를 받으시다가 하양에서 투병을 이어가셨죠. 바깥 환경은 감염 위험이 높아 절대로 나오시면 안 되는 거였는데, 학생들 공연이 있을 때면 기어코 무대를 보러 오시는 겁니다. 누구도 말릴 수 없었죠. 그 아픈 몸으로 객석에 앉아 무용수 하나하나를 유심히 봐주셨어요.
그러다 그해 5월쯤, 드디어 완치 판정을 받으신 거예요. 기쁜 마음에 수성구 한 식당에 모셨더니, “나 다음 학기에 바로 복귀할 거야. 그리고 이번 가을에 ‘생생무용제’에 나가자. 안무는 네가 맡는 것이 어떻겠니?”라며 소녀처럼 들뜨셨더라고요. 그리고 아직은 조심하셔야 하지 않겠냐며 염려하는 저를 보시고는 “나 다 나았어! 이제 정말 열심히 해야 해. 이번 ‘대구 즉흥 춤 페스티벌’ 나가는 애들도 벌써 다 만나고 왔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러고는 다음 날 완치를 기념해 떠났던 경주 여행에서 열이 나 응급실로 옮겨졌는데, 알고 보니 대상포진이 왔던 거예요. 그 길로 이틀 만에 돌아가셨어요. 충격이 엄청났죠.
사실 교수님 돌아가신 후 방을 제가 정리했는데, 그때 마음이 더 아프더라고요. 어마어마한 무용 책자와 자료들 사이에서 작고 예쁜 찻잔들이 많이 나왔거든요. 연구실 방에서도 고운 그릇 세트들이 잔뜩 있었죠. 하나 같이 뜯지도 못한 것들이었어요. 그 그릇에는 소녀 같던 교수님의 또 다른 꿈이 비쳐 보이더라고요. 결혼하셨어도 너무나 예쁘게 잘 사셨을 텐데. 여자로서 꽃을 다 피워내질 못했던 것 같아 한편으로는 너무 안타까워요.
Q. 교수님이 작고하신 지 벌써 7년이 지났습니다. 요즘도 생각이 많이 나시겠어요.
김선영 : 제가 매주 수요일이면 수업을 하러 대구가톨릭대학교에 가요. 그때마다 텅 빈 교수님 방을 지나치는데, 교수님이 연습하고 계실 것만 같은 겁니다. 20년 이상 이른 새벽 가장 먼저 연습실에 오셔서 제일 늦게 나가시던 모습이 너무나 선해서요. 무용에 모든 것을 던진 삶이었죠. 이런 김소라 교수님의 모습과 정신을 후배들이 배우고 계승했으면. 그리고 그의 삶이 절대 잊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진출처_대구문화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