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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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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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_캐리커처 에세이
김소라를 생각한다
글_김기전 (사)다다 대표 / 전 대구시립무용단 초대안무가
캐리커처_ 김승윤
고(故) 무용가 김소라 캐리커처

옛 기억을 더듬어본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하던 습관대로 일찍 일어난다. 하루일과 속에 낮잠은 없다. 낡은 수첩 속에 하루 일과표를 작성한다. 언제나 스마트 폰이 내 옆에 친구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벨이 울린다. 대구문화재단 홍보팀 웹진 담당자의 전화다. 김소라 교수에 대해 글을 써달라고 한다. 짧은 순간에 많은 추억들이 지나간다. 그리고 옛 기억을 더듬어 본다.

김소라 그는 아버지 김상규, 어머니 최원경, 주연희. 모두가 60년대 대구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무용가족들이었다. 그 속에서 김소라는 어려운 예술 활동을 해야 했다. 나와 최원경은 특별한 인연이 있다. 우린 첫 아이를 같은 해 출산했다. 난 아들 그리고 그는 딸, 바로 정기홍, 김소라. 그들은 지금 이 세상에 없다. 70년대 나는 공연, 경연대회 등 작품 활동을 하며 바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MBC TV 방송 <목요바레> 프로그램에서 무용 창작공연을 기획 했다. 1972년 5월에서 1973년 3월까지 33회에 걸쳐 방영했다. 1년 여 동안 여러 장르의 창작 무용으로 미술과 무용, 음악과 무용, 문학과 무용, 사진과 무용 등 작고하신 정점식 교수와 대담도 하고 30분의 영상으로 무용 관객을 방안에서 보는 공연을 했다. 최원경 그는 언제나 내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친구였다.

1980년 대구가 직활시로 승격되고 예술단에서 무용단, 합창단을 창단하게 되었을 때 안무자로 부름을 받게 돼 운영하고 있던 ‘대구 바레 아카데미 학원’을 20년 만에 닫게 됐다. 연구생이었던 제자 30명과 학원 기구 모두를 최원경에게 넘겨주었을 당시 김소라는 서울에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학생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어머니가 대구에서 연구소를 하게 되어 졸업 후 김소라는 대구에 머물게 되었다. 그때 효성여자대학 무용과 교수의 자리가 있어 운 좋게 젊은 나이에 대학 강단에 서게 된다.

– 김소라 프로필 –
· 1957년생
· 이화여대 무용과 및 동대학원 졸업
· 1986년-1987년 – 뉴욕마사그램스클, 페리댄스센터 리지재즈센터에서 수학
· 2002년 – 런던라반센터에서 프로페셔널리풀로마과정을 이수하였고
대구카톨릭대학에서 1983년-2010년까지 근무 중 유명을 달리했다.

김소라는 고향인 대구에서 효성여대 무용과 전임교수로 재직하면서 소라댄스앙상블, 시리우스 등 제자들로 구성된 동문단체를 결성하여 대구지역 무용 활동에 크게 기여했다. 지방에서는 교육과 창작을 병행해야하는 다소 불리한 조건에서도 중앙무대와 활발히 교류하며 활동했다. 비록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춤이란 ‘육체의 말’이라고 여긴 부모님의 춤 철학을 본받아 주옥같은 작품들을 안무했다.

1981년 「저문날 허공에서」, 1984년 「하늘을 향한 두 개의 창」, 1988년 「호수에 잠긴 달」, 1990년 「적멸의 새」, 1992년 「타악기를 위한 움직임」, 1998년 「사계」, 2000년 「겨울새」, 2003년 「파장」, 2004년 「여정」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당시 함께 했던 제자들은 현재 대구시립무용단에서 무용수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최상열, 김분선, 서혜영, 최윤정, 권효원 등의 제자들은 김소라 교수를 이렇게 회상한다. ‘성격이 소녀 같이 여리시고 굉장히 순수하신 분이셨으나 작품 활동에 있어서는 대단한 열정을 가지신 안무가이면서 무용가이셨다’고 전한다. 그 외에 함께 활동 하는 장현희, 김선영 선생님 등의 제자들이 대구의 무용계의 별들로 존재하고 있다.

<대구무용 발전을 위한 심포지움> 왼쪽부터 김태원평론가, 고(故) 김소라교수, 정막 평론가(2004. 7)

김소라는 무용가를 부모로 둔 행운아였다. 어머니 최원경은 아버지 김상규 선생의 제자이자 연인이었고 훗날아내가 됐다. 김소라는 무용을 전공한 부모 밑에서 나고 자란 덕에 무용가의 길을 가게 되었으리라 본다. 김소라 선생은 창작 열정과 지적 욕구가 대단한 무용가였다. 스승인 육완순 교수는 이렇게 회고하여 전해왔다. ‘사람이 머물다 떠난 곳에는 누구나 삶의 흔적이 남게 됨이다.’
우리 곁에서 훌쩍 떠나간 김소라 교수가 아직 대구 어딘가에서 학생들과 함께 있을 것만 같고 서울 어디선가 학생들과 내게 전화해 줄 것만 같은데 이제 내 손에 사진 몇 장만 남아 있다. 사람이 살다보면 일 년 쯤 얼굴도 못보고 전화연락도 없이 사는 경우도 있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지만 내 손 언저리에 문득 그 이름이 눈에 들어오면 가슴이 꽉막혀오는 슬픔이 내 눈시울이 붉어지는 까닭인 듯하다. 아무래도 우리가 이 땅에서 헤어진 것이 맞는 듯 내 머리가 힘을 잃어 가고 있다.

특히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1981년 서울공간사랑소극장에서 김소라 첫 발표회를 열었다. 작품 「연」, 「저문날 허공에서」 등 김소라 특유의 감각과 테크닉이 잘 조화된 작품이었는데 이날 함께 감상하셨던 평론가 고(故) 김영태 선생님께서 좋은 토양과 알맞은 온도에서 잘 피어난 아름다운 날처럼 모든 조화가 잘 어울려진 훌륭한 예술가라는 평을 하셨다. 너무 일찍 떠나서 많이 보고 싶지만 그동안 잘 가꿔 놓은 작은 난초처럼 아름답게 잘 자라고 있는 모습 속에서 그를 사랑했던 모든 이들의 마음에 영원히 기억되기를 기원한다고 전해왔다.

또 내가 본 작품 중에서 1987년 8월 13일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14번째 공연의 막을 올렸을 때였다. 작품 「겨울새」는 김소라의 대본으로 5개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작품 「겨울새」의 중요 단어를 보면,
1. 닫힌 공간에서… 고립. 갈망. 좌절
2. 도회에서… 사치. 인위. 만남
3. 자연인간새에서… 빼앗간 꿈. 잃어버린 나와 너
4. 겨울밤바다 폭풍에서… 소멸. 공허. 죽음
5. 새벽 봄을 기다리며… 영원. 비상. 넓은 시계

변증법논리의 정형 스타일로서 한결 낙도여인의 애로와 어두움이 깔려있고 그래도 딛고 일어서야 하는 숙명을 노래한 춤 공식으로 고립된 점이 농축되어 있었다. 결론적으로 주제 표현을 위한 알맞은 춤 언어의 창출이 성공적이었다. 김소라의 작품세계는 남의 영토를 넘보거나 기웃거리지 않은 쇄죽적 성향이 분명히 짙다. 모던에서 컨탬 포러리로 그리고 포스트모던의 세계로 변천하는데 새것에 대한 도전과 시도는 영원히 하지 않을 것인지 궁금했다. 보는 눈과 발상의 폭을 넓히고 마음의 창을 열어 시대의 흐름과 함께 가면서도 개인성과 특색을 살리는 방향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봤다. 즉 안무 폐쇄성을 탈피해야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고(故) 무용가 김소라

김소라의 작품은 서정적이며 테마를 아카데미한 감성으로 풀어내어 한국현대무용의 미학적 흐름에서 가장 보편적인 정서로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작품 「목마루 풍경」은 그 누구보다 어머니의 사랑과 속 깊은 정을 지녔던 김소라의 따스함과 맑은 영혼이 되살아나는 무대가 아닐까 싶었다. 너무 일찍 세상과 이별했지만 예술을 향한 열정과 창작정신 그리고 무용 업적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로 대구무용계를 밝혀줄 것이다.
김소라 아버지인 김상규 선생님은 70년대 안동교육대학으로 발령을 받고 교육자의 길로 대구를 떠나셨다. 그 후 제자 주연희와 파트너로 무용 활동을 하면서 안동에서 대구로 주연희 선생과 함께 하는 행사와 공연을 할 때 마다 김상규 선생님을 종종 뵙기도 했다. 어머니 최원경은 딸 소라만 바라보며 평생을 사신분이다. 그도 한때 무용가로 많은 활동을 하셨다.

1969년 7월 제1회 최원경 무용발표회를 서울 국립극장에서 공연했을 때 작고하신 신송범 선생님의 격려사가 생각난다. ‘최양의 무대를 처음 본 것도 어언 20년 전이다. 날씬한 체구 그리고 아름다운 선, 지성을 간직한 무희였다.’ 그간 인생의 쓰라림을 겪으며 무용가로서 재출발하기 위하여 3년 전 저의 연구소에서 정열을 다해 기교와 창작에 여념이 없이 연습한 결실로 공연무대를 가지게 됨은 참으로 눈물겨운 일이었다. 쓰라린 상처를 예술을 위하여 정진해온 최원경씨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란다는 인사를 격려서로 대신해주셨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현대무용가로 오늘의 대구의 현대무용발전에 크게 공헌하신 분들이다. 2010년 8월 1일에 김소라가 사망했고 유명을 달리한 딸 소라를 생각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낸 친구 최원경은 2017년 3월 14일에 조용히 요양원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그들은 원불교신자였다. 지금도 원불교대구교구에서 그들을 사랑하는 신도들에 의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사진출처_김기전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