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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기고1>
작곡가로 살아가다.
글_여승용_작곡가
YONG studio 대표
작곡가라는 이름으로 살아 온지도 10여년의 세월이 훌쩍 넘었다.
강산이 바뀌는 시간이라더니……
난 그리 변한 것도 없어 보인다.
뭐 대단한 것을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날들의 평범하거나 어쩌면 조금은 특별할 수도 있는 소소한 단편들을 들려드리려 한다.
선배 예술가들에게는 가소로운 투정이 될 것이고 이제 막 시작한 후배 예술가들에게는 삶의 또 다른 예시가 될 수 있길 바란다.
또 이 글을 읽고 있을 어느 누군가에게는 순간의 꺼리가 되어도 좋겠다.
어린시절 난 참 진지한 아이였던 것 같다. 아니 진지하다기 보다는 무슨 고민이 많았던 것 같은데 무엇인가 꽉 막힌 구석도 있었다. 하나에 관심을 가지면 집요한 정도로 집착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또래의 아이들과는 다르게 조숙했다. 성격도 약간 내성적이다 보니 혼자 사색, 공상 하는 시간이 많았다. 우주에 대한 다큐를 보고는 외계인과 우주의 끝에 대해 몇 달을 고민하기도 하고 유치한 시 구절을 생각해내곤 여러 단어들과 조합해보는 그런 감성적인 구석도 있는 아이였다.
어느 날 시골에 할머니 댁에 갔다가 아버지께서 옛날에 쓰시던 작은 방 박스에서 몇 백장의 레코드판을 발견하게 됐다. 그토록 고지식하고 엄격하신 아버지께서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즐겨들으셨다는 얘기를 듣자니 그때는 그게 참 신기하고 흥미로웠던 것 같다. 그것을 아버지께 받아들고 집으로 가져와보니 어린 내가 듣기에도 좋은 음악들이 많았다.
당시 나는 항상 자기 전 라디오를 들었는데 좋은 음악들이 흘러나오면 어김없이 메모를 해두고는 다음에 레코드 방에 가게 될 때 꼭 찾아보았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뭐든지 보고 들을 수 있는 시대지만 그 시절엔 뭔가 보고 듣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레코드 판이 내겐 큰 보물처럼 느껴졌었다.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아바 같은 팝에서부터 조용필, 나훈아, 이미자 같은 대중가요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음악을 언제든 들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음악을 직업으로 해 살아갈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주 어릴적부터 피아노학원을 다니긴 했지만 그건 맞벌이를 하셨던 부모님이 퇴근하기 전 작은 아들의 방과 후 시간 떼우기용 정도 였을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가는데 나는 도시락 까지 따로 싸서 피아노 학원으로 갔고, 거기서 오후 시간을 보냈다. 아마 특별히 피아노 선생님에게 부탁을 하셨던 모양인데 피아노에 흥미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좋든 싫든 계속 피아노 소릴 들어야 했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그만한 조기교육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이 끝날 무렵,
내 소년기의 가장 큰 사건은 바로 ‘기타’다.
초등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졸업 선물로 기타 한대를 사게 됐다.
팝음악 월간지를 보곤 록 밴드들의 활동 사항, 배경 등을 줄줄 외울 정도로 록 음악에 심취 하게 된 것이다. 밴드에 관심을 가지면서 기타 연습실과 밴드 합주실을 기웃거리면서 음악에 대한 뭔가 새로운 갈망 같은 것을 충족 하곤 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여러 장르의 음악을 할 수 있게 된 영양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친구와 사소한 말다툼
다 그런 건 아니였지만 밴드하는 친구들, 형들이 본인이 하는 음악 장르와 다른 음악을 좀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난 그게 싫었다.

록, 메탈도 좋아했지만 대중가요, 팝 음악도 그만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고집이 있었던지 그날로 합주실에 가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작곡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처음에는 가사부터 시작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당시 썼던 가사들이 있는데 유치해서 못 봐줄 정도다. 하지만 그때의 열정과 진지함은 너무나 컸다. 적지 않은 습작들이 나오면서 더 많은 장르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면서 이사를 하게 됐는데…..

운명의 장난처럼 오케스트라 연습실과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집이 있었다.
항상 들려오는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 소리…… 많은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친구와의 좋지 않은 연으로 어두운 날들을 보내게 됐다. 공부와는 담을 쌓고 안 좋은 일만 골라가며 하고 다닐 만큼 말썽만 피웠다. 사춘기의 반항심으로 방황만을 거듭하던 중 수학교사였던 담임선생님의 따뜻한 배려로 마음을 다잡고 미뤄뒀던 음대 입시준비를 다시 시작해 작곡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음악의 힘이 아니였다면 지금도 그때처럼 계속 어두운 길을 걸어갔을지 모른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지난 열정이 되살아나면서 작곡가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성실함을 무기로 항상 노력하는 자세로 임했던 대학생활이 끝나갈 때 즈음 지인의 소개로 작은 음악스튜디오에 실장이 되었다.
하지만 음악가로 살아가야한다는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만은 않았다.

녹음 작업을 하면서 컴퓨터음악에 관한 기술과 정보를 독학하며 배고픈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시를 가사화해서 대중가요로 만드는 팀에 합류하게 되면서…..

나는 시노래 작곡가로 데뷔를 하게 됐다.
뭐 데뷔랄 것까지도 없지만 발매된 앨범에 작곡가로 이름을 처음으로 넣게 되었으니 데뷔라면 데뷔일 것이다. 평소 시를 좋아했던 나는 시인의 꿈도 있었기에 잠을 설치며 많은 시 노래 곡들을 만들어 냈다. 지금 생각하면 대중가요 가사와는 사뭇 다른 일반적이지 않은 표현이 많은 시를 노래화하는 작업은 훗날 대사를 노래로 구성해야하는 뮤지컬 작업에 많은 연습과 기초가 되었다. 그 후 나는 극단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승용 작곡가의 뮤지컬 대표작들
연극, 뮤지컬 음악을 시작하기 위해 몸소 부딪혀가며 열정과 능력을 검증해 보여야했지만 자신감이 있었기에 즐겁기도 했다. 때로는 서글플 때도 많았다. 큰돈이 되지 않아도 뭐든지 열심히 임했고 아동 뮤지컬 작업을 시작으로 여러 무대 음악을 만들었다. 극단 한울림에서 공연한 22회 대구연극제 대상작 「도서관 가는 길 」의 음악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공연무대 음악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공연음악작업은 너무나 고되고 힘들 때가 많지만 또 그만큼 보람이 컸다. 좋은 공연을 관객들에게 선보였을 때의 성취감을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
뮤지컬 극단 MAC 시어터에서 작곡가로, 음악 스텝으로 활동하면서 뮤지컬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다.
모든 공연예술이 마찬가지겠지만 제작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보니 밤을 새우기 일수다. 우스갯소리처럼 들릴지 몰라도 정확히 말할 수 있는 건 무대공연예술 분야의, 특히 작곡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급할 때 밤을 새울 수 있어야 하기에 체력이 좋아야 한다. 그리고 예전보다는 좋아졌다고는 하나 아직은 모든 지방예술의 여건이 완전치 못하다 보니 금전적으로도 많은 기대를 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어느 광고의 문구 처럼 “열정 그 이상의 열정”이 필요한 것이다.
뮤지컬 라이브 밴드 연습 中
여러 작품의 스텝을 거처 감사히도 초이스 시어터에서 신작 뮤지컬의 작곡을 단독으로 맡게 되면서 음악감독으로 정식 데뷔하게 되었다. 스텝으로 참여 할 때는 사소한 사항에도 불만을 생각하게 되는데 책임자로서 작업을 진행해보니 생각지 못했던 많은 부분을 감수하게 되었고 새삼 먼저 이 길을 걸었던 선생님들과 선배들의 존경심이 더 커져만 같다. 그리고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느끼며 더 큰 꿈을 그려나가게 되었다.
현재……
그리고
미래……
지금은 멀티미디어 세상이다. 오선지에 음표를 기입하는 곡 작업만으로는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사운드를 만들어 낼 수 없으므로 현대의 작곡가는 컴퓨터 음악능력이 수반 되어야 한다. 디지털화 된 시스템에 발맞춰 나가야지만 앞으로 시장성 있는 음악들을 만들고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 더 많은 사람과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앞으로도 내가 가져가야 할 숙명일 것이다. 최고가 되기 위한 노력보단 최선을 위한 노력을 따르며…..
오늘도 여전히 작곡가로 살아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