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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1
지역 여성 문화, 너의 이름은
글_ 최세정 대구여성가족재단 연구위원
‘너의 이름은’. 문득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일본 애니메이션 제목이 떠오른다. 맥락과 상관은 없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지역 여성 문화’에 대한 것이다.
사회는 지금까지 문화 분야에서 활약해온 여성들을 ‘여류’라 불렀다. ‘여류’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전문적인 일에 능숙한 여자를 이르는 말’이다. 단지 ‘여류’라는 틀에 갇혀 평가받지 못하고 이름 한번 제대로 불리지 못한 예술가들이 많다. 남성들이 써내려간 역사에 여성들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여성은 역사에서 잊힌 존재이고 주변화 되어왔다.
오늘은 그들의 이름을 불러보려고 한다. 지금 대구는 명실상부한 문화도시다. 그렇게 되기까지 시대를 앞서 길을 개척한 ‘여성’들, 바로 ‘너의 이름’을 불러보려 하는 것이다.
대구 근대기 본격적인 예술의 맥락에 닿으려면 ‘기생’과 만나게 된다. 대구의 경상감영 교방은 기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노래와 춤을 관장하던 기관이다. 기녀들은 악기, 노래, 춤 등 각종 기예를 익혀서 각종 공적인 연회를 맡았다. 기생은 사회계급으로는 천민에 속하지만 시와 서에 능해 교양인으로 대접받는 특이한 존재였다. 기생을 교육하던 시설인 권번은 정식 국악교육기관은 아니었지만 민속음악의 교육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1910년대 공연계에는 기생이 중심에 있었고 1920년대 후반 음반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기생은 명창의 반열에 올라 공연예술계의 주인공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박녹주, 김초 등의 판소리 명창이 배출되었고 가무에 능한 박귀희, 권명화 등도 권번에 소속되어 있었다.
한편 기생 이외에도 많은 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영남지역 최초의 여성 성악가인 추애경(1900-1973)도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대구신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이화학당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1927년 6월 추애경이 미국으로 유학간다고 하자 대구 음악인들이 송별음악회를 마련했다. 대구를 떠나기 하루 전날인 6월 3일, 대구제일소학교(옛 중앙초등학교 자리) 강당에서 추애경의 송별음악회가 열렸다. 추애경을 비롯해 김애국, 주복남, 박태준, 차원석, 견신희가 출연했다. 특히 주복남의 피아노 반주에 박태준이 ‘이별가'(잘 가시오)를 노래해 아쉬움을 표현했다고 한다. 대구 음악사에서 아주 특별한 한 장면이다. 미국 보스턴의 음악잡지 ‘음악평론’에서는 추애경을 ‘리릭 소프라노로 조선의 천재’라고 격찬한 바 있다. 꾸준히 음악 활동을 했지만 아이들 양육을 위해 성악 활동을 접어 아쉬움이 남는다.1)

권명화(무형문화재 제9호 살풀이춤 보유자) (사진출처_「대구 예술 여성」대구여성가족재단, 2017년)
대구가 배출한 최초의 대중가수는 장옥조이다. 눈을 일부러 안대로 가려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시키며 일명 ‘미스 리갈’로 큰 인기를 모았다. 1935년 리갈레코드를 통해 유행가 ‘고향아 잘 있거라’로 데뷔했고, ‘신잡살이 풍경’ 등 25곡 분량의 가요 작품을 발표하면서 의욕적인 활동을 펼쳤다.2) 장옥조가 발표한 노래 ‘신접살이 풍경’을 살펴보면 당시 신혼부부의 풍경이 떠오른다.
‘오늘은 일찍오마 약속하시고 자정이 지나 한시 반인데 왜 인제 오세요 내일도 그렇게 늦게 오시면 싫어요 네 꼭 일찍와요 네 얼른 오세요 네/회사에 취직할 때 월급을 타면 핸드백하고 파라솔하고 사주마 했지요 가을이 다 가도 안 사주시면 몰라요 네 꼭 사주세요 네 사다 주세요 네.’
장옥조는 간드러지는 콧소리가 특징적이다. 하지만 여성은 노래 속에서 남성 의존적인 태도만 유지하고 있어 당시 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한 신여성의 새로운 인식은 결여되어 있다. 한편 대중문화가 싹트기 시작할 무렵, 대구는 전국에서 피난민이 모여들면서 대중문화가 일찍 꽃 피었던 도시다. 당시 대구는 대중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1950년대 6・25전쟁 시기에는 대구가 한국대중문화 전체의 절반에 해당하는 권위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추애경(왼쪽), 추애경의 송별음악회(매일신보 1927년 6월 6일)
휴전 후 대중음악은 빠른 속도로 회복해갔다. 1947년 해방 직후 이병주가 악기사를 재편해 대구에 오리엔트레코드사를 설립하면서 대구는 대중가요의 생산지 역할을 했다. 당시는 음반산업의 초창기로 1946년 부산의 코로나, 47년 설립된 고려, 럭키, 대구의 오리엔트, 유니온레코드사 밖에 없었다.3) 귀국선, 전우야 잘 자라, 전선야곡, 굳세어라 금순아, 아내의 노래, 님 계신 전선, 미사의 노래, 고향초 등 한국 가요사에 길이 빛나는 노래들을 대구에서 만들어 발표했다.

이 시기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이 영화 ‘미망인'(1955)을 제작, 발표한다. 현재 서울여성영화제는 한국 최초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을 기리기 위해 박남옥영화상을 제정해 상을 수여하고 있다. 박남옥은 누구일까. 대구에서 매일신문 기자로 일하던 박남옥은 해방 이후 영화의 세계에 뛰어든다. 1954년 딸을 출산한 박남옥은 몸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갓 태어난 딸은 봐줄 사람이 없고 맡길 곳도 없어 등에 업고 다니며 영화를 만들었다. 박남옥은 스태프들에게 밥을 해먹여가면서, 중앙청에 있는 녹음실을 아이를 업고 드나들며 영화를 만들었다.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영화 ‘미망인’은 1950년대 영화로 시사하는 점이 많다. 당시 사회적 문제로까지 제기되었던 전쟁 미망인 문제를 다루면서도 이 영화는 전통과 근대의 갈림길에 선 여성들의 성적 욕망을 첨예하게 다루고 있다.4) 미국에서 지내던 박남옥은 2017년 타계했다.

영화 「미망인」 포스터(왼쪽), 영화 「미망인」의 한 장면
뛰어난 소설가이자 기자로는 장덕조가 있다. ‘경북출신 여기자 1호’로, 휴전협정을 취재한 유일한 종군 여기자라고 기록되고 있다. 250여 편이 넘는 장편 및 단편, 희곡까지 남겼으며 특히 장편 역사소설 분야를 본격적으로 개척한 선구자이다.5) 역사소설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지만 친일 성격을 띤 글을 다수 발표했다. 근대기부터 현재까지 여성들이 문화 영역에서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여성들은 이중, 삼중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분야에서 배제되는 것은 물론이고 여성으로 끊임없이 윤리적 평가를 받아야 했다. 1920년대 신가정 속의 여성에게 제시된 모범적 삶은 살림 잘하고 가정을 원만하게 운영하는 현모양처였다. 뛰어난 화가였지만 이러한 결혼관을 벗어나 파국을 맞은 나혜석은 시 ‘노라’에서 “나는 인형이었네 아버지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인 인형으로 그네의 노리개였네”라고 고백하고 있다.

장덕조(왼쪽), ‘광풍'(1954) 인화출판사. 대구문학관 소장
대구여성가족재단이 지난해 펴낸 대구여성생애구술사 책 ‘대구 예술 여성’에는 1930년대에 태어난 여성들이 1940, 50년대 대구에서 예술 활동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활동하면서 느꼈던 어려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권명화(1934년생)는 아버지가 “손을 분질러버리면 춤을 못 추지 않을까 해서 화로에 있는 달군 쇠로 때렸다”고 했다. 한글서예가 류영희(1942년생)는 한문서예를 배우려 하자 스승이 “여자들은 과객이야. 지나가는 과객이지, 끝까지 하질 않아.”라고 말하며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러한 편견을 이겨내고 평생 한 분야에 몰입한 끝에 지금까지도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다. 김종복(1930년생)은 당시 나혜석, 천경자 정도만이 활동하고 있던 화단에서 활발하게 활약하면서 오직 작품으로 승부를 걸었다.
1972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가서 새로운 문화와 예술을 개척하기도 했다. 이렇게 특유의 끈질김과 열정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길이었다.
현재 활약하고 있는 예술가들은 어떤가. 1세대 여성 예술인들과 달라졌을까. 아니다. 여전히 여성들은 이중적 어려움을 견디고 있다. 청년 예술가를 만나는 자리에는 여성이 수적으로도 훨씬 많거나 비슷하다. 하지만 중견 예술가들은 어느덧 남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수많은 여성들이 중도에 그만 두어야 했던 이유는 창작활동을 지원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크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대구 문화 지형에서 네트워크 형성에 약한데다 결혼을 하는 동시에 작업 활동이 힘들어진다. 일‧가정 양립을 하자는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조성되어가고 있지만 아직은 과도기다. 결혼과 동시에 애써 만들어온 네트워크에서도 멀어지기 쉽다.

대구의 풍부한 문화적 토양, 나아가 우리나라 문화계의 뿌리에는 분명 수많은 여성들의 도전과 삶이 응축되어 녹아 있다. 우리가 지금 어디쯤 왔는지 돌아볼 때, 그 여성들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길에 여성들도 당당히 설 수 있도록 새로운 토양을 마련해야 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그렇게 할 때 대구의 문화 토양이 더 풍부하고 다양해질 것이다.

  • 1)손태룡, 「피아노가 낙동강을 타고 들어오다」, 보고사, 2015, 406-411쪽
  • 2)이동순, 「대구+기억 대구테마노래 40선」, 대구광역시 펴냄, 5쪽
  • 3)(사)거리문화시민연대, 「대구신택리지」, 북랜드, 2007, 400쪽
  • 4)주진숙‧장미희‧변재란, 「여성영화인사전」, 소도, 2001년, 56-60쪽
  • 5)강윤정 외 5인, 「길을 만든 경북여성」,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3년, 1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