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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을 들어가며
글_윤규홍 2018 대문편집위원
최근 출판계에서는 1997년에 나왔던 페미니즘 잡지 『이프 If』 창간호가 다시 출판된 사건이 화제다. 『이프』는 그 이전에 나왔던 『여성과 사회』, 『또 하나의 문화』, 『여/성이론』과 같은 잡지들이 학술지 혹은 동인지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에 비해 흔히 이야기하는 여성잡지에 가까운 형식과 내용을 표면에 두르고 있었다. 즉 이 잡지는 페미니즘의 대중화를 선도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런 사회 경향을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1997년 그 해에 대학에서 처음으로 사회학 교양수업을 맡았던 필자는 스스로 딱히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음에도, 학생들에게 이 잡지를 소개했었다.
1997년에 나왔던 페미니즘 잡지 『이프 If』 창간호(일부분) (사진출처_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페이스북)

2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이 책이 원본 그대로(물론 기념하는 애장판 성격을 갖고 있지만) 복간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바로 지금 여성해방론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뜻이 되기도 하고, 또 달리 보면 현재가 어떤 점에 있어서는 그때에 비해 별로 나아진 게 없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근래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문화예술계로 한정지어 보자면 하나는 유명 인사들의 성폭력 사건, 또 다른 하나는 성불평등 사회를 규정하고 묘사하는 문학과 예술작품의 조명이다. 이것은 분명한 시대의 흐름이다. 이 흐름은 근대 이후 어느 시점에서는 느리게, 또 어느 시기엔 너무 격정적으로 물길을 틀어 지금에 이르렀다. 지난 세기동안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이념 대결을 하던 초기를 지나 급진적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그리고 탈근대주의 페미니즘까지 논의 및 강령이 다양해진 여성해방론의 갈래는 어쩌면 현대 예술 사조의 발전이나 분화에 비교할 때 오히려 단순한 외형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와 문예이론은 늘 같이 진전해왔다. 1969년 케이트 밀레트의 『성의 정치학』 이후, 예컨대 크리스테바, 쇼왈트, 이리가레이, 식수스 등의 페미니스트 학자들의 연구 저술활동은 주로 이전 시대와 동시대의 여러 문학과 예술작품 비평에 맞추어져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학술적인 분야와 대중의 관심은 다르다. 대학교에서 먹물을 빨아들인 지식인들이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우리가 사는 사회가 갑자기 달라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여성해방론은 예술의 전통을 깨트리고 벗어나려는 컨템포러리 아트 이론만큼이나 당황스럽고 어려운 것이었다. 아니, 이제 조금씩 생기는 자기 성찰적 시각으로는 한국의 지적 체계라는 것도 수많은 갈래의 지적 사고를 우왕좌왕 찾아 떠난 우리나라 유학생들이 우연히 접한 지도교수나 주제를 챙겨 들어와서 우리 학계에 뿌린 결과다. 지금 예술이론 현장에서 곧잘 입에 오르내리는, 위에서 언급한 페미니스트 거장의 이름조차 현지에서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는 것이 믿겨지는가? 학자뿐 아니라 예술가나 사회운동가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불편한 진실이다. 이와 같은 작동원리는 서구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지방으로 기울어진 불평등의 위계를 따라 재생산된다.

「대문」 여름호(제26호) 기획특집 최윤정, 페미니스트그룹 게릴라걸즈

이번 『대문』 여름호(제26호)의 기획특집은 “예술, 여성, 지역”이다. 지면에 채운 우리들의 생각은 다음 물음과 통한다. 현재 여성이 예술 체계에 기여하거나 소외되는 상황이 존재한다면, 여성 예술가들은 이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가? 그리고 이 모순된 상황과 그 대안의 모색까지도 서구에서 수입하며 또 그런 짝사랑조차 수도권을 중심으로 벌어진다면 예술가, 여성, 지방에 살아가는 이 세 가지 취약한 조건에 매겨진 이들은 무력할 수밖에 없는가? 평론가, 예술기획자, 예술감독, 번역가, 교수, 큐레이터, 아트매니저 등 수많은 이름으로 포장한 지식과 예술의 보따리 수입상들이 벌여놓은 판은 대구문화계도 직간접으로 바꾸어 놓았다. 흥미롭게도 이 결과가 어떤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다. 세계와 젠더와 지역의 불평등 구조가 옳고 그름의 판단을 떠나 현재 대구문화의 정체성이 되었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자는 미지근한 입장도 존재한다. 다름 아니라 이 글을 쓰고 있는 편집자 본인의 생각이 그렇다.

그렇지만 이번 호 특집을 위해 귀중한 원고를 보내준 필진들의 생각은 나보다 훨씬 더 치열하고 용기 있고 절실하다. 최세정 선생은 우리 지역의 여성계와 예술계의 교집합을 부단히 관찰하고 있는 연구자다. 그가 참여한 대구여성생애구술사 『대구 예술 여성』(대구여성가족재단)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20세기 중반에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해 지금에 이른 여성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다. 지금도 거리낌 없이 쓰이는 ‘여류’라는 수식어를 달고 활동해 온 여러 여성 예술가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관하여 글쓴이는 자료를 통해 예시한다. 그리고 현재 활동하는 젊은 여성 예술가들의 삶 또한 선배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이 글의 결론 앞에 놓인 예술사회학의 가설이다.

문학평론가 송현지 선생은 1990년대 초반에 나왔던 정화진의 시를 분석하고 있다. 시인의 어린 시절 경험이 토대가 된 시를 읽는 것은 인류학적인 조사처럼 사라져가는 풍습을 관찰하는 일과 같다. 정화진의 텍스트 속에 담긴 내용은 희생 제의와도 같지만 소박할 수밖에 없었던 음식문화가 어린 눈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아이의 관점에서 끔찍한 살육이 벌어지던 곳은 부엌이며, 그곳은 곧 자기 방이 없는 여성들의 공간이다. 필자는 아름답고도 슬픈 역설의 시어를 통해 육식과 채식의 대립된 관점을 일방적 희생과 쌍방의 대화의 관계로 진전시켜 해석하고 있다.

사회학자 최종렬 선생은 유지영 감독의 영화 「수성못」에 관한 비평을 보내왔다. 필자가 해석한 영화 「수성못」은 자본주의 계급사회에서 수직적 사회이동을 꿈꾸는 상대적 약자들의 분투기다. 지방대 학생들의 대학 편입 의지는 취업에 의한 신분상승을 위한 중간 단계임이 당연하다. 하지만 영화에서 삶의 매 순간은 그러한 중간 목표조차 삶의 준거가 되는 주객전도된 현실을 그린다. 실패는 자살 시도로 이어지며 수성못은 그 주변 경관이 보여주는 상업화된 자본주의의 상징 아래에 시커먼 물밑의 죽음을 대비시킨다. 여성해방론이 문제제기하는 이중억압론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두 가지 모순의 결합이 한국 여성들을 얽매고 있다는 가정은 「수성못」을 통해 두 가지 형태의 질서에 앞서 지역차별이란 문제를 제시한다.

「대문」 여름호(제26호) 기획특집 최종렬, 영화 「수성못」 스틸컷

최윤정 큐레이터는 미투 운동이 계기를 마련한 페미니즘 미술의 현주소를 기술하고 있다. 문단 나눔도 없이 숨 막히게 써내려간 서론만 보더라도 그가 생각하는 실천으로서의 미술이 얼마나 절박한 가치를 담고 있는지 우리는 공감할 수 있다. 그가 소개하는 ‘게릴라걸즈’는 페미니즘 행동주의로 정의되고 있다. 동시대 미술 속에서 이 운동이 가지는 정체성과는 별도로 하나의 사회현상인 ‘게릴라걸즈’의 인식 토대는 급진적 페미니즘일 것이다.

급진적 페미니즘은 예컨대 법과 제도의 개선을 통한 여성문제의 해결을 꾀하는 자유주의나, 자본주의 모순의 하위 요소로서 여성차별을 다루는 마르크스주의보다 훨씬 더 거친 투쟁을 꿈꾸어왔다. 그 속에서 남녀 공동체의 분리를 주장하는 극단적 시각은 예술가들의 낭만적인 일탈성과 결합하여 매우 과격하지만 또한 의미 있는 미술 운동으로 기록된다. 필자는 이러한 하나의 사례를 놓고 지금 한국의 여성 미술이 취하는 태도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특집 기획에 힘을 보탠 필자들이 현실에 대한 우려나 분노를 격앙된 목소리 대신 비유적인 표현이나 사실 근거에 기초하여 담담한 관점으로 정리해 준 점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여기에 모은 우리의 생각과 기록은 대구 문화 속에서 또 하나의 긍정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