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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기고 #2
순간포착
글_이소진 artist
나는 이곳에서 미술을 하는 작가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은 감수성과 생태계 흐름에 대해 민감하게 작용해야 하는 것 같다. 또 작업은 그 만의 발현되는 계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감의 순간이 곧 무언가를 표현 하고 싶은 욕망과 욕구라고 정의 한다면, 필요에 따라 혹은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는 그 순간은 내 작업에서 중요한 모티브이다. 나는 평소 주위 환경 속 불특정 대상에 대해 관찰과 수집하는 습관이 있다. 과거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 지속되는 만남과 육감으로 느끼는 이 체험들은 각 시점마다 처해있는 상황과 연결되어 저장 된다. 그 저장고에서 그들만의 관계성이 생기게 되고 그것을 다시 연상하는 방식을 통해 이미지를 만든다. 그래서 그간 작업을 하며 경험했던 인상적인 만남과 영감의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표면 아래 그 무엇…_2015 제주도
그 해는 작업 일정이 빡빡했던 시간 이였다. 물들어 올 때 노 저어야 한다고 닥치는 대로 뭐든 결과물을 만들고 싶었다. 1월부터 시작된 전시 일정은 11월 까지 이어졌다. 그만큼 포트폴리오 속 작품 페이지는 늘어가고 있었지만 에너지는 바닥나고 있었으며 겉포장만 화려한 텅 비어 있는 상자가 된 기분 이였다. 또 작품 발표와 함께 동반하는 다양한 말들로 인해 주체인 내 자신도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쉽게 흔들린다는 것은 현재 나로서 올곧이 서있을 수 없다는 것의 방증이니까.. 평가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내 모습은 없고 아무도 모를 어떤 것에게 허락 받고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우습게도 나를 옥죄어 왔다. 영양가 없는 달콤함에 길들여져 결과물은 무수히 뽑아 낼 수 있지만, 과정의 대한 가치를 잃은 체 의미 없는 움직임만을 반복했다. 해내면 된다고 믿었던 생각들이 하찮게 느껴졌다. 지금도 별반 다를 것 없는 시간과 겨루고 있지만 그 때 만큼은 지나친 허무함을 느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기회가 닿아 아직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동료 작가들과 함께 제주도로 떠났다. 그 여행의 키워드는’꿈과 희망을 찾아서_나름 진지함’ 이였는데, 2개월 남짓 후 오픈해야 할 개인전을 위해 쉼 없이 소모되었던 나와 작업을 위한 휴식과 재충전을 위한 것 이였다. 여행 3일째 되던 날 이였던가… 사람이 찾지 않는 해변에서 바닷물과 맥주를 실컷 마신 후 넓은 벌판을 따라 정처 없이 걷던 와중 폐쇄된 올레 길과 민속촌을 만났다.
울타리 없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지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 문. 어떠한 통제 없이 드나듦이라는 상징만이 존재했다. 볼 수 있는 것 그 너머의 무엇을 스스로 그려내야만 통과 할 수 있는 그 문은, 표면 아래에 잠시 잊고 지냈던 절박한 무언가를 찾을 수 있게 해주는 표식 같았다. 시점과 종점의 경계가 희미한 그 다음의 것이 무엇인지 예측할 수 없는 이 시간 속에서 오히려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주 민속촌_2015
어떤 사건의 시작이 되는 이 문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을 때 민속촌에서 억새풀로 만들어 진 자연 정수기를 보게 되었다. 억새풀을 땋아서 나무에 걸어 놓고 타고 내려 온 물을 정화해서 항아리에 담는 방식 이였다. 커다란 나무와 억새풀 동그란 항아리까지. 자연물과 손으로 빚어 놓은 항아리의 조합이 흥미로웠다. 또 그 주위엔 버려진 공간들이 있었는데, 필요에 의해 갖춰놓은 것들이 방치 된 흔적이 굉장히 오묘했다. 음습하긴 했지만 그들만의 세상을 누군가가 발견 해주길 바라는 듯 고스란히 우리를 기다리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서있는 한 뼘의 시간은 흐르고 있었지만 그 곳은 정처 없이 멈춰있는 것 같았다. 민속촌에서 보게 된 여러 장면들은 발견되지 않은 표면 아래의 어떤 것. 길에서 만난 문은 그것을 발견하기 위한 빌미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본 것들을 바탕으로 작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선 기존에 자주 쓰던 화려한 색을 사용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른 것에 물들여지지 않은 그대로의 색. 그리고 유기적인 형태와 장식도 최대한 배제했다. 이전의 것과의 완연한 결별이 아닌 다시 건설되는 시점을 표현하고 싶었다. 통로와 문의 형상을 일정하지 않은 두께의 나무로 틀을 만든 후 얇은 종이와 아사천, 실 등으로 면과 형태를 구성했다.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는 종이들은 불완전함을 뜻하기도 하고 그 구조 사이를 지나며 놓치고 있던 것들에 대한 깨달음과 더 나은 곳으로 향하게 하는 의식을 치루는 가설적 무대이다. 또한 5개의 불완전한 문과 4개의 비어있는 통로를 통해 재생과 순환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표면 아래_ 각목,노루지,실,아사천 Installation 2015
기존의 방식을 잠시 내려두고 비워낸 상태에서 다시 채워낸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의미가 있는 일이였다. 저 작업에서 의도한대로 지난 것에 대한 점검이자 앞으로의 나에게 보내는 안녕 이였다. 저 여행에서 보낸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또 억지스럽게 무언가를 꺼내보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시간은 특별한 정서적 체험이 되었다.
움직이는 영역moving territory_항주
2016년엔 중국 항주에 있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 있다. 시차적응이 필요한 먼 나라도 아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3개월을 작업하고 생활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평소 생활 영역에 대해 집착이 있는데 새로운 문화에 대한 설렘과 함께 지나친 걱정도 동반이 되었다. 거리상 가까운 곳이지만 익숙한 환경이 바뀐다는 것에 엄청 예민해져 있었다.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사각형의 공간 안에 얼마나 나를 놓일 수 있는가에 대한 낯설음과 긴장감이 상당했다. 한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이 한 뼘의 공간에서 구축 할 수 있는 자가 영역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면서 동물들이 둥지를 틀 듯 영역 확보를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중국어로 할 수 있는 말이1.2.3.4,’안녕”고마워”미안해’가 전부인 나는 그 곳과 맞닥뜨렸다.
평소 가늠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먼저 육감으로 받아들이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그 방식을 이용해 필요한 것들을 시각적인 수집을 통해 이해하고 작업으로 풀기로 했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지만 최대한 로컬처럼 살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계획은 나름 잘 진행된 것 같다. 방문객으로써 지인 할인이 되는 단골집, 친구들이 있는 아지트 등을 만들었으니까. 그때 나는 내가 그렇게 사교성이 좋은지 처음 알았다. 언어엔 한계가 있으니 몸짓, 표정으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계심을 떠나 적극적인 표현을 우선시 했다. 어느 순간 중국인인 코디네이터 선생님보다 가게에서 물건 값을 더 잘 깎는 외국인이 됐다. 오죽하면 실크 스카프를 파는 거리에 갔을 때 가격 흥정을 중국어를 못하는 나에게 부탁 할 정도였으니까. 나는 단지 좋아함과 고마움을 단순히 표정과 감정으로 충분히 표현하고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것이 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리낌 없는 긍정의 표현이 상대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았던 것 같다. 감각을 이용한 표현으로 의사소통과 생활을 하다 보니 오히려 수집은 더욱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낯선 것에 대한 경계심을 덜어내고 즉각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받아들였다. 뜻 모르는 문자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음식을 주문하거나 약국을 이용 할 때 수집한 이미지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사진, 영상, 소리에 대한 기록물을 만들었고 필요에 따라 작업에 쓸 재료들도 모았다.
촬영영상 스틸컷_2016
우리는 평소 작업의 소스를 위해 무언가 끊임없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각자의 기준으로 분류 시키는데 그때 나의 카테고리는 생존을 위한 영역 탐색 이였다. 원하는 목적지에 가기 위해 무엇이든 꼼꼼히 보고 지나쳐야 했다. 그러면서 문자를 이미지화 시켜 기억하고, 풍경 속에서 발견하는 다양한 선과 형태들을 오롯이 몸으로 흡수했다. 그리고 익숙한 것이라 여기고 그냥 지나치는 것들에 대해 한번 더 관찰했다.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자유로울수록 가슴에 담아야 할 것들도 많았다. 그 많은 것들 중 내 것으로 소유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꼈다. 또한 필요에 의해 시작되었던, 스스로를 그 곳에 적응시키기 위해 했던 기록들은 작업의 중요 포인트가 되었다.
1~2. Scene series1.2_ 39x27cm 종이,혼합재료 2016_항주
3. Moving Territory P.1_ 계란바구니, 망, 실 Installaiton 2016_항주
건물 공사 중인 외부 프레임. 비 오는 날 어디선가 들려오던 노래 소리, 120일의 아침을 책임지던 아직도 이름은 알 수 없는 요거트, 어여쁜 계란 바구니, 전통 건물과 지붕 곡선, 그들의 붉은 색 등 이 모든 것을 생김새와 느낌으로 기억하고 저장했다. 그리고 정해진 의미를 떠나 낯선 것을 마주하고 흡수하는 순간의 희열을 작업으로 남겼다.
움직이는 영역moving territory는 항주에서 시작되어 아직도 진행 중인 개인 프로젝트이다. 총 1.2.3장으로 나뉘며 그만의 결과물이 존재 한다. 1장과 2장의 결과물은 어느 정도 완료 했지만, 아직은 과정 중에 있다. 오감으로 흡수 했던 흔적들과 그 곳의 잔향들은 마음으로 작업 오브제로 간직하고 있다. 올해 계획은 미완성된 2장과 마지막 3장을 완성 시키는 것이다.
둥지:들뜸_스프링쿨러 지지대, 나무, 실,아크릴 Installation , 2017
안녕安寧_하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을 찾을수록, 만날수록 생겨나는 것들은 세상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 된다. 서로 다른 시점을 가진 이미지들이 서로 융화되는 과정에서 완연한 소멸은 없으며, 단지 반복과 재생을 통해 순환 한다. 그리고 적절하게 변형될 뿐이다. 아직도 먼 곳. 그 심연 속의 것들은 다 드러나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도는 형상들의 생성과정은 자연발생적으로 움직이며 각자의 생존 방식대로 자리한다. 이런 흐름은 삶을 살아가는 것과 닮아 있다. 하루에도 몇 번 씩 나를 다독이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그들이 앞으로의 시간에서 각자의 자리를 잘 잡을 수 있기를 온힘으로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