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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대구예술의 힘 : 시인, 박해수
천국에서도 간이역 시 쓰시겠지요
대담_정호승 시인 / 글_신상조 문학평론가
신상조 : 안녕하세요, 선생님?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시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선생님과 함께 박해수 선생님을 추억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박해수 선생님은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나 1974년 제1회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습니다. 수상작 ‘바다에 누워’가 1985년 대학가요제에서 ‘높은음자리’가 노랫말로 차용해 같은 제목의 곡으로 대상을 수상했고, 그 곡은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여전히 애창하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다는 점에서 두 분은 공통점이 있다고도 여겨집니다. 박해수 선생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추억이 있으신지요?
정호승 : 해수 형을 생각하면 해수 형과 우연히 만났던 장면 두 개가 먼저 떠오릅니다. 아마 거기에는 이제 일상에서는 더 이상 해수 형을 만날 수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겠지요.
무더위가 한창이던 2013년 8월 9일 오후, 동대구역 대합실에서 우연히 해수 형을 만났습니다. “어, 정시인!” 하고 반갑게 손을 내밀며 해수 형은, 친구와 같이 부산에 갈 일이 있어 동대구역에 나왔는데 나를 만났다며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시인 정호승, 박해수, 수필가 최현득(왼쪽부터)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동대구역에 내리자마자 뜻밖에 해수 형을 만난 터라 저 역시 반갑기 그지없었습니다. 하지만 내심 미안한 마음이 앞섰지요. 평소 해수 형을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닌데다, 그해 봄에 모 TV방송과 ‘정호승 문학의 고향 대구를 찾아서’ 촬영을 해수 형과 하기로 날짜까지 약속해 놓고 방송사 측의 잘못을 들어 내가 일방적으로 취소해 버린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해수 형은 그런 일은 전혀 개의치 않고 “대구에 강연 왔나? 요즘도 많이 바쁘제?”하며 마냥 반가워하기만 했습니다.

“이것도 기념인데 우리 사진 한 장 찍자.”

마침 친구 분이 카메라를 지니고 있어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습니다. 저와 해수 형과 해수 형의 친구 분 셋이서 동대구역 대합실 안에서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고, 그러고는 바로 헤어졌습니다. 저는 서둘러 동대구역을 빠져 나갔고 형 또한 “또 만나자.”라는 말을 남기고 급히 개찰구로 빠져나갔습니다.
이듬해인 2014년 10월 11일 오전 11시 경에 형을 또 우연히 만났지요. 울산 통도사 서운암 무위선전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4회 전국문학인 꽃축제’에서 강연을 하고 막 행사 현장을 빠져나올 때였습니다.

“정 시인!”

누가 저를 다정히 부르는 소리가 있어 돌아보았더니 해수 형이었어요.

“아니, 여기 웬일로?”

형은 겸연쩍은 듯한 미소를 띠면서 “정 시인 보러 왔지.”하고 말하더군요. 참으로 뜻밖이었습니다. 저는 형이 그 행사에 참석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거든요. 사실 그 일주일 전에 형과 통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신상조 : 일상에서의 안부 전화였습니까?

정호승 : 아닙니다. 형이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선거에 출마할 의사가 있다는 내용의 전화였지요. 좀처럼 제게 전화를 하지 않는 형이 그런 전화를 해와 적이 놀라움이 컸습니다. 전 그런 형을 만류했지요.

“형, 출마하지 마세요! 서울의 문인들이 그런 ‘권력’을 지방에 있는 문인한테 주려고 하겠어요?”
“그러니까. 그래서 출마하려고 해. 이제 지방에 있는 문인한테도 기회를 줘야 하지 않나?”

나중에 형과 전화 통화하면서 “문협 이사장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했다.”라는 말씀을 들었지만, 그날은 ‘형이 문협 선거 운동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었습니다. 어쨌든 그게 형과 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참으로 짧은 만남이었습니다.

신상조 : 아쉬움이 많이 남으셨겠습니다.
정호승 : 물론입니다. 그 뒤 이듬해 2015년 1월 21일에 해수 형의 별세 소식을 듣고 참으로 망연했습니다. 그 누가 형의 죽음을 예상할 수 있었을까요? 누구에게나 죽음은 갑자기 찾아올 수 있지만 그토록 일찍 형이 우리 곁을 떠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형과 같이 TV영상 촬영을 하지 않은 일이 후회되고, 대구에 갈 일이 있어도 바쁘다는 핑계로 형을 찾아뵙지 않은 일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형은 왜 그리 일찍 떠나셨을까. 2014년에 발간한 형의 시집 제목이 『맨발로 하늘까지』입니다. 맨발로 걸어서 하늘까지 가신 걸까요? 형은 그 시집의 자서自序에서 “이승의 삶도 보이고 죽음도 보인다. 대구에 살면서 시의 그늘 속에 꼭꼭 숨어서 맨발로 하늘까지 가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형은 그때 이미 죽음의 손을 잡고 길 떠날 채비를 차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상조 : 망연자실하시고 안타까우셨겠습니다. 아픔은 늘 남은 자들의 몫이니까요. 고인과는 어떤 계기로, 또 어떻게 친분을 쌓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정호승 : 해수 형을 처음 만난 건 제가 1965년 봄 대륜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문예반원이 되면서였습니다. 그 무렵 저는 산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계성중학교에서 문예반 활동을 할 때 운문에 관심을 가지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내심 산문에 대한 관심이 컸지요.
그런데 막상 대륜 문예반원이 되고 보니 당시 3학년이었던 박해수 형은 장상태 형과 『꽃의 언어』라는 시집도 발간하고 ‘고교생 시인’으로 그 문명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문예반 담당 이성수 선생님께서도 시인이시라 저는 자연히 운문 분야에 마음이 더 기울어져 열심히 시를 쓰기 시작했지요. 신라문화제 때 해수 형과 경주 계림 숲에서 있었던 백일장에 참여한 일은 지금도 기억이 선명합니다.
해수 형 집은 달성공원 안에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달성공원에 있던 신사神社 부속 건물인 관리소 건물이 바로 해수 형 집이었고, 해수 형은 그 집에 살면서 탁구장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시를 쓰면 학교에서 해수 형에게 보여주기도 했지만 가끔 달성공원으로 해수 형을 찾아가 보여주곤 했습니다. 그러면 해수 형은 나를 꼭 이상화 시비 앞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시는 이렇게 쓰는 거야.”하고 제 시에 대한 품평을 정성껏 해주곤 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이 쓴 시가 좋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도 해수 형은 잘 썼다고 곧잘 칭찬을 해주곤 했는데, 저는 그 칭찬에 힘입어 열심히 시에 마음을 던졌지요.
신상조 : 시에 막 눈을 뜨기 시작할 때 그런 좋은 선배가 곁에 있었음은 크나큰 축복이었겠습니다.
정호승 : 그럼요, 축복이지요. 지금도 해수 형과 함께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게로”하며 시비의 시구를 읽었던 기억이 잊히지 않습니다.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등학생 때 박해수 형한테 시를 배웠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 저의 말을 풍문으로 들은 때문인지 몇 년 만에 어쩌다가 한번 만나도 그 누구보다도 저를 살갑게 대해주던 형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형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잃지 않았고요.
신상조 : 선생님 마음을 아마 고인께서도 천국에서 다 아시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저 하늘에 계신 박해수 선생님께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면 이 자리를 빌려 말씀해 주시지요.
정호승 : 형, 잘 지내시지요? 고등학교 때 수업시간에 형이 안 보이자 선생님께서 “박해수 어디 갔어?”하고 물었는데, 누가 “박해수 바게쓰 들고 물 뜨러 갔십니더.”하고 대답하는 바람에 웃음바다가 되었다는 에피소드가 문득 떠오릅니다. 형의 이름이 일본말 ‘바게쓰(양동이)’와 다소 발음이 비슷해서 누가 장난을 친 거라지요.
해수 형! 형은 정말 이승을 떠나 저승에까지 ‘바게쓰’ 들고 물 뜨러 가셨는지요. 만일 바게쓰에 물을 가득 담으셨다면 이승으로 다시 돌아오셔서 서정의 물기가 바짝 말라버린 이 땅의 많은 시인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세요.
그리고 혹시 천국에서 아씨시 프란치스코 성인을 만나시면 제 이야기도 좀 해주세요. 해수 형도 세례명이 프란치스코이지만 저 또한 세례명이 프란치스코입니다. 작년 9월엔 보름 동안이나 프란치스코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 이탈리아 북부 아씨시로 가보기까지 했습니다마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지닌 시인으로서의 순수한 마음을 본받으려고 해도 그게 잘 안됩니다. 어떻게 하면 성인의 마음을 닮을 수 있는지 좀 여쭈어주세요.
해수 형, 그곳 천국에서도 예전처럼 간이역에 관한 시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결국은 천국도 우리가 가지 않으면 안 될 하나의 간이역이겠지요. 시인으로서의 형님의 영혼을 위해 늘 기도하겠습니다.
*이 글은 『대륜 문학』 15호(2016년)에 실린 정호승 시인의 「천국에서도 간이역 시 쓰시겠지요」를 토대로 한 가상의 인터뷰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