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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Work & Life Balance)의 시대
글_이정미 대구경북연구원 부연구위원
워라밸의 시대
최근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워라밸’ 시대가 새로운 사회현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워라밸’은 워크-라이프-밸런스(Work & Life Balance)를 줄인 말로 일과 삶(가정, 여가, 학습, 휴식, 건강 등)의 균형을 뜻한다. 이는 베이비부머가 일선에서 물러나고 1980년부터 1995년 사이에 출생한 Y세대(현재의 2030 세대)가 사회의 주요 계층으로 성장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개인의 삶을 중요시한다. 월화수목금금금에서 벗어나 현재의 삶에서 적절한 여가생활을 즐기며, 주택 구입, 결혼 등 사회의 고정적 관념에서부터 자유롭다.
개인의 소박한 삶에 주목하다
최근 인터넷상에는 사회변화를 반영한 수많은 신조어가 등장하고 있다. 한 번뿐인 인생에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현재를 즐긴다는 의미의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 덴마크의 ‘휘게 라이프’, 인생의 가치를 작고 소박한 것에서 찾자는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스웨덴의 ‘라곰’ 등이 그것이다. 휘게(Hygge)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안락함, 편안함’이란 뜻으로 편안하고 아늑한 상태를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의미한다. 즉,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양식을 통해 편안함과 만족감을 느끼는 상황이나 감정을 포괄한다(자료출처 : 다음백과 > 휘게). 휘게는 편안함의 가치를 강조하며 행복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사소하게 즐기는 아늑함에 있음을 환기하며 촛불 아래 친근한 몇몇 사람들과 소박하지만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삶을 유행하게 하였다.
휘게 라이프(사진 출처 : https://brunch.co.kr/@jungjina/62)
최근에는 스웨덴의 라곰(Lagom) 스타일이 대두되고 있는데, 이는 ‘지나치게 많지도 작지도 않은 상태’를 뜻하며 화려함보다 소박하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 스웨덴의 전통적 티타임 브레이크인 ‘피카(Fika)’가 대표적인 라곰 스타일의 하나이다. 잠시 일을 멈추고 차와 간식을 즐기는 시간에서 삶의 확실하고 소박한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또한, 미국에서는 ‘100m 마이크로 산책(Micro Walks)’가 유행하고 있는데, 1년 내내 100m 반경을 걸으며 세밀하게 주변을 관찰하며 소소한 행복을 찾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 현재에 최선을 다 하면서 소소한 것에서 삶의 행복을 누리자는 의미이다. 이면에는 저성장 시대 불확실한 미래, 양극화 현상 등에 대한 일종의 체념적 사고로 ‘즉각적 충족감’에 치중하는 현상이 내포되어 있다. 상대적 박탈감과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느끼는 일종의 공허함을 극복하기 위한 현상인 것이다.
노동, 시간, 변화
워라밸의 실현을 위해서는 ‘고용’과 ‘시간’이 필요하다. 최근 신세계는 임금삭감 없는 주 35시간 근무 제도를 내걸었고, 일반적으로 야근이 일상이라고 알려져 있는 IT업계, 게임업계 등도 근무환경의 체질개선을 시작하고 있다. 2016년 게임업계 개발자들의 잇단 사망소식은 지난 반세기동안 급진적인 성장을 거치면서 ‘일’에 매몰된 대한민국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과도한 업무 강도와 열악한 노동 환경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반복되는 야근과 스트레스로 일과 삶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몸과 마음에 병이 든 이른바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는 직장인들도 적지 않다. 직장인뿐만 아니라 학업과 가사노동에 찌들려 우울감에 시달리는 학생들과 주부들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화가 나거나 쉽게 짜증이 나는 등 감정 조절이 잘 안 되고 우울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과 삶의 현장을 잘 분리하고 운동, 관계망, 취미생활 등으로 스트레스를 잘 관리하는 것으로 일과 삶의 균형을 찾는 방법밖에는 없다.
SNS(인스타그램) 속 ‘욜로 라이프’ (사진 : 인스타그램)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 두 번째로 긴 시간을 일하는 반면, 1인당 노동생산성은 34개국 중에 28위 수준으로 매우 낮다. 다른 나라들은 어떠한가? CNN Money(2014년)에 따르면 최단시간 근로국가인 네덜란드 근로자는 주당 29시간을 일하는데, 2000년 제정된 ‘근로시간조정법’1)에 따라 근무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며 그에 따른 차별은 없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 호주, 스웨덴, 벨기에, 스위스, 덴마크, 독일, 노르웨이 등의 근로자도 하루 6~7시간 일하며, 3주~8주에 이르는 장기휴가를 보장받는다. 이들은 모두 최고의 복지와 소득을 자랑하는 국가들로 우리나라의 상황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충분한 휴식은 개인의 행복을 증진시키고 노동의욕을 고취시켜 노동생산성의 향상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 노동환경의 변화 요구에 대한 반응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세계는 최근 주 35시간 근무제를 실험적으로 도입하며 실현 방안으로 ‘PC셧다운 제도’ 등을 실시하고 있다. 주 35시간 근무제는 프랑스 등 유럽 선진국을 중심으로 시행되고 있는 제도인데 신세계의 이러한 행보는 근로자의 여가 보장이라는 사회적 흐름에 함께한다는 긍정적 의미와 함께 근로시간 단축 논의를 다른 기업으로 확대했다. 롯데백화점, 현대백화점, 삼성전자, SK, GS, 아모레퍼시픽 등 대기업이 동참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여가 시간이 확장되면 쇼핑 등에 사용할 시간이 많아지게 되므로 결국 유통업계에 이득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이러한 변화가 점차 확대되어 근로 문화로 정착될 날도 멀지 않았다.
IT 게임업계인 넥슨과 엔씨소프트는 ‘유연근무제’를 실험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다음카카오는 파격적인 휴가제도와 자율적인 근무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위메프는 맞춤형 워라밸 등 ‘핀셋복지’를 시행하고 있다. 일-가정 양립을 위한 ‘슈퍼우먼방지제도’, 신규 직원을 위한 ‘웰컴휴가’, 생일 등 특별한 기념일에 조기 퇴근을 보장하는 등의 맞춤형 복지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맞춤형 복지정책에 힘입어 위메프의 실적 또한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 일과 삶의 균형이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킨다는 증명이다.
이러한 워라밸 현상에 따라 ‘여가’를 중심으로 한 산업이 블루오션으로 등장하고 있다. ‘일’에 매몰되어 살다가 갑자기 생긴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취미’를 정기적으로 배달해 주는 ‘하비박스(Hobby-Box)’등의 신산업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경험’과 ‘취향’을 중시하는 ‘취향공동체’로 대변되는 생활문화도 확산되고 있는데 생활문화 속 취향 공동체는 향유와 소비, 생산에 이바지하며 새로운 소비문화를 창출하고 있다. 과거 만화나 영화와 같이 특정 문화콘텐츠를 탐닉하는 이들을 지칭했던 ‘오타쿠’가 요리, 실내장식 등 생활문화 분야로 확대되며 취향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아마추어 만화동아리의 대표 축제인 ‘코믹월드’, 디저트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과자전’ 등 취향을 공유하는 모임의 다양화(축제 등) 현상이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생활문화는’문화와 예술의 일상화’를 통해 취미를 누리는 사람이 소비자 역할을 하고 있으며, 콘텐츠와 작품을 생산하는 생산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균형’을 바라보다

어떻게 하면 일과 생활의 균형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 삶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을 삶과 명백히 구분할 수 있는가?
사람들이 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교 조사한 ISSP(국제사회조사프로그램) 결과를 살펴보면, 미국은 자아실현형, 일본은 관계지향형, 프랑스는 보람중시형, 한국은 생계수단형으로 분류되었다. 과연 우리에게 일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그치는 것인가? 일(직업)에 대한 의미 정립은 일과 삶의 균형을 찾아가기 위해 실행되어야 하는 첫 번째 단계이다. 근로자를 조직의 단순한 부품같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근로자가 일을 일답게 할 수 있도록 작업환경과 문화를 갖추어주고, 그 안에서 일을 통한 직업정체성을 찾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는 일과 삶 사이의 균형뿐만 아니라 다양한 것들 사이에서의 균형을 요구한다. 전통과 현대, 느림과 빠름, 아날로그와 디지털, 농어촌과 도시, 지방화와 세계화, 삶의 양과 질, 물질과 정신, 기술과 인문 사이의 균형 등이다. 아인슈타인은 S(성공)는 X(열심히 일하기) + Y(인생을 즐기기) + Z(고요하게 침묵하기)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다. 일 속에서 의미를 찾아 열심히 일하고 삶 속에서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즐기며 고요하게 침묵하는 것이 삶의 성공이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고독의 아름다움(The Beauty of Solitude)’이다.

오늘날 우리는 4차 산업혁명으로 명명되는 ‘기술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살고 있다. 동시에 천천히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자하는 ‘아날로그적’인 삶을 갈망하는 양상도 나타나고 있다. 개인이 기술의 변화를 잘 수용하고 긍정적인 가능성을 최대화하여 시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연계와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 일의 현장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며 인간 고유의 창의력과 감성, 공감능력을 유지시키고 발전시켜 자아정체성을 확립하는 곳으로 변모하기를, 대한민국 국민이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저녁이 있는 삶을 찾고 일상을 즐겁게 누릴 수 있도록 ‘워라밸’이 실현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