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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과 회한 가득한 슬픈 도시 대구의 이야기
이룸 장편소설 『설리화야 설리화야』
글_양준석 소설가

이룸 작가의 장편소설 『설리화야 설리화야』는 여러 면에서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대구 지역의 방언이다. 하류인생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투리는 같은 지역에 사는 독자들에게도 쉽지 않게 다가온다.
작품 속엔 수성교 아래 신천에서 살아가는 여러 노숙인들이 등장한다. 생존경쟁에서 패자가 되어 노숙자로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에게 장밋빛 미래가 있을 리 없다. 오늘만 살아가는 이들의 언어에서 일반인들의 교양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끼니를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나락에 떨어진 군상들의 삶은 안쓰러우면서도 처량하기 이를 데 없다. 욕지거리와 저주가 난무한다. 그 모습들이 지역의 방언과 중첩될 때 독자들은 책장을 넘기며 당혹감을 느낀다. 그만큼 거칠다.

주인공 규대와 도람의 어릴 적 풋사랑은 어떠한가. 의성의 사방물이라는 산골 오지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둘의 이야기는 독자를 지고지순한 아름다움으로 이끈다. 사업실패로 노숙인이 된 규대의 도람에 대한 그리움은 애가 타는 듯이 깊고 절실함이 느껴진다. 사고로 다리를 잃고 뿌이라는 이름으로 몸을 파는 여자 도람, 그녀의 삶에 각인된 수많은 상처들은 구슬프고도 쓸쓸해 절로 한숨짓게 된다. 두 주인공의 어긋남과 재회는 읽는 이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지만 그 풋사랑 같은 애틋함은 가슴을 시리게 한다. 그만큼 순수하다.
그만큼 거칠고 그만큼 순수하니 독자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극과 극의 이미지가 한 권의 책 속에 묘하게 그리고 낯설게 어우러져 있다. 하지만 처음의 혼란스러움은 작가 특유의 입담과 연속되는 서사에 이내 사라지고 만다. 거침과 순수함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독특한 매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력 속에서 독자들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다.

이룸 장편소설 『설리화야 설리화야』
세월과 추억, 신천은 흐르고 수성못은 고였다.(p.13)
『설리화야 설리화야』는 그리움에 관한 소설이다.
주인공 규대와 도람뿐만이 아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이 그리움 속에서 허우적댄다. 과거를 후회하고 한탄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워한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92년의 대구는 전국체전이 한창이다. 이 체전은 작품의 처음에서 끝까지 계속해서 언급되는데 그것은 곧 현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현재라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삶에서 아주 멀리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체전, 즉 현재는 수성교 아래에서 노숙하는 삶의 실패자들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다. 체전은 축제이고 즐거운 것이며 도시를 더 화려하게 한다. 노숙인들의 삶은 그와 정반대이다. 도시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노숙인들은 대구의 이미지를 망치는 불편하고 지저분한 존재일 뿐이다. 수성교의 포토존과 동부교회의 십자가가 상징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는 연인들과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노숙인들과 결코 조화될 수 없는 현재를 상징한다.
등장인물 중 전라도에서 온 장씨라는 사람이 있다. 장씨는 자신과 하등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체전에 큰 관심을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고향의 고교 배구팀을 응원하기 위해서이다. 왜일까. 현재를 부정하고 지나간 날들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다른 강과 달리 북쪽으로 흐르는 신천도 규대의 그리움을 나타낸다. 그의 고향은 대구의 북쪽에 있는 의성이다. 북쪽을 향해 흐르는 신천의 물소리와 그 강을 따라 걷는 규대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독자들은 주인공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작가는 ‘신천은 흐르고 수성못은 고였다’고 표현하였다. 세상은 강물처럼 흐르지만, 자신들은 흐를 곳이 없어 고였다는 것을 빗대어 표현했던 걸까. 물론 그들도 흐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떠날 미래가 없다. 그래서 과거의 그리움 속으로 흐르려 한다.
현재를 살아갈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미래를 꿈꿀 수도 없는 규대와 도람. 그들이 갈 곳은 과거뿐이다. 현재와 미래는 그들을 원하지 않는다. 과거만이 그들에게 문을 열어준다. 규대와 도람의 재회가 어릴 적 풋사랑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들이 현재를 벗어나 과거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규대가 공룡발자국을 따라 걸어본다. 눈을 감는다. 예전처럼 도람이 그를 따라 온다. 뒤를 돌아본다. 그새 도람이 사라진다.
물수제비를 한 번 더 날린다. 뿌이에 대한 시름을 멀리 보내고 싶지만 그의 가슴 속에서 떨어지지 않는다.(p.214)
주인공 규대는 이른바 교양이 없는 사람이다. 품위가 없고 상스럽다. 그의 행동과 대사에서는 천박함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이 만든 그의 겉모습일 뿐이다. 그의 내부는 겉과는 반대로 순박한 서정으로 가득하다.
어릴 적 규대는 이사를 가는 도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설리화 한 무더기를 꺾는다. 도중 규대는 바위에 머리가 찍혀 피를 흘리게 되는데 그때 생긴 상처로 껌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다. 작가는 설리화의 꽃말이 영원한 사랑이라 하였다. 도람에 대한 그의 영원한 사랑을 지워지지 않는 정수리의 흉터로 보여주고 있다.
규대는 도람을 반드시 만나려 하지만 둘의 재회는 무척이나 어렵다. 서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어찌 된 일인지 자꾸만 어긋난다. 작가가 표현한 대로 곁에서 그를 따라오는 것 같지만 뒤돌아보면 그새 도람은 사라지고 없다. 사실 어긋남은 규대의 삶이기도 했다. 그는 강풍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꺾인 나뭇가지일 뿐이다. 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바람은 절대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규대의 인생처럼 도람과의 만남은 반복해서 어긋난다. 하지만 규대는 멈추지 않는다. 그 소녀가 어른이 되어 어떤 처지가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도람에 대한 사랑은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사랑은 눈 속에 피어있는 설리화의 꽃말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어른이 된 그의 겉모습은 투박하고 거칠다. 그렇게 변한 겉과 달리 그의 마음속은 달라진 것이 없다. 신천을 따라 걸으며 뒤돌아보고 도람을 떠올리는 것, 막연히 물수제비를 날려보는 것, 그것이 바로 규대의 변하지 않은 마음속이다.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잃지 않은 그의 순수성, 독자가 규대와 도람의 만남에 큰 감동을 받는 이유이다.

모든 이에게도 그렇듯 모든 장소에도 역사가 있다. 이 거친 세상에서 그 역사가 언제나 아름다울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항상 비참한 것도 아니다. 해학과 한이 이곳저곳에 뒤섞여 있다.
소설 『설리화야 설리화야』에는 지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친숙한 장소들이 등장한다. 수성교 주변은 물론이고 방천시장과 칠성시장, 동부교회, 동신교, 수성못, 동대구역까지 모두 익숙하여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쉽게 그려진다.
그 중 주요 무대는 수성교 아래와 신천의 둔치이다. 배경이 1992년인 만큼 당시 신천 일대와 지금의 모습은 상당 부분 다를 것이다. 지금의 수성교 아래에는 단 한 명의 노숙인도, 단 한 채의 움막도 없으니 말이다.
신천을 따라 길게 잘 정비된 산책로와 자전거길은 대구의 랜드마크 중 하나가 되었다. 대화를 나누며 걷는 중년의 여성들과 자전거를 타는 젊은이로 가득한 그곳은 지역민들에게 훌륭한 휴식을 제공하는 소중한 도시공원이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둔치의 산책로와 조경수가 마냥 예쁘고 정겹게만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시장이나 다른 장소도 마찬가지이다. 삶의 뒤틀림을 펴지 못해 수성교 아래에서 노숙했던 인간 군상들의 모습과 규대와 도람의 상처 입은 삶을 떠올리면 우리와 그저 친숙하기만 했던 그곳이 이젠 그리움과 회한의 장소로 느껴지게 된다.
이는 1992년이라는 과거의 일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우리가 경쾌한 음악과 함께 수성교 아래의 산책로를 걷고 있을 때 그 누군가는 슬픔과 상실 속에서 하염없이 눈물짓고 있을 것이다. 노숙인과 움막, 시장의 사창가만 사라졌을 뿐 또 다른 규대와 도람은 이 시대에도 어느 가까운 곳에 있을 테니 말이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가련한 삶들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소설 『설리화야 설리화야』는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끔 한다. 또, 이 땅에 태어나 발 딛고 한 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어떤 기준만으로 허투루 판단하지 못하게 한다.
무심코 지났던 그 장소,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다시 떠올려보게 한다는 점에서, 더군다나 우리가 잊고 있었거나 몰랐던 도시의 기억을 다시 전해준다는 점에서 『설리화야 설리화야』는 지역을 대표하는 문학작품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작가는 독자에게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여러 소도구와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정수리의 지워지지 않는 흉터는 물론이고 도람이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석류석 거울, 규대가 시장에서 산 운동화 그리고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고향의 이팝나무도 모두 그들의 그리움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이러한 장치들은 소설의 극적인 마무리를 더 돋보이게 하며 문학적 카타르시스를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물론 그중 가장 중요한 메타포는 소설의 제목에 두 번이나 연결된 설리화이다.
그리움과 순수함, 어쩌면 회한까지 상징하는 눈꽃 설리화.
우리 무의식 깊은 곳에 설리화 한 송이가 아직도 피어있다면 밖으로 꺼내 곁의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