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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품의 가치에 대한 새로운 충동을 불러일으키다
대구미술관 2018 소장품<수직충동, 수평충동>전 리뷰
글_황석권 《월간미술》 수석기자

당연한 이야기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실견하려면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을 방문하여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인파와 함께 상당한 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 이를 두고 우스갯소리로 “<모나리자>가 루브르를 먹여 살린다”라고도 한다. 좀 시기 어린 투로 말하자면 “그냥 소장품 한 점”인데…. 이렇듯 어떤 미술관의 소장품은 바로 그 미술관의 정체성을 의미한다는 등식, 아니 법칙은 부인할 수 없는 명제이다. “<모나리자>가 루브르박물관이고 루브르박물관이 <모나리자>”라는 등식과 그 역이 성립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렇다면 소장품은 미술관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우리 현실에서 원래 미술관의 소장품전은 의례적인 상설전이나 일종의 보고전이라는 의식이 뿌리 깊다. 이는 달리 말하면 기획력이 관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술관의 주요 기능 중 하나인 미술품 수집활동과 그와 관련한 전시는 앞서 언급한 대로 그 미술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임에도 그간 묵시적으로 정례화된 “하니까 해야 하는” 관성적 행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실제 국내 국공립미술관의 소장품전은 대부분 상설전 형식으로 열리고 있다. 시대별, 장르별, 사조별 구분의 전시형식을 취하고 있어 관람객은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전시장을 나서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간혹 열리는 <○○미술관 소장품전>과 같은 이른바 ‘블록버스터 전시’에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 미술관이 소장품 수집에 있어 특이점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말이며 그 자체로 작품소장 정책의 열악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대구미술관 소장품전 전시전경
그런데 미술사(史)에서 소장품전의 의미가 단순하다는 것을 반박한 전시의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영국미술을 세계적으로 알린 <Sensation전>은 이른바 ‘yBa’로 일컬어지는 영국의 동시대 젊은 작가의 작품을 다수 소장한 찰스 사치(Charles Saatchi)의 컬렉션을 모아 선보인 전시였다. 이 전시는 런던의 왕립예술아카데미(Royal Academy of Arts in London, 1997.9.18.~1997.12.28)에서 개최되었는데 이후 베를린(함부르거 반호프)와 뉴욕(브룩클린뮤지엄)에서도 열렸다. 다양한 논쟁을 일으킨 이 전시를 통해 영국 동시대 미술은 그야말로 세계적인 관심을 이끌었다. 물론 제목 그대로 ‘선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 내용은 동시대 미술이 과연 어떠한 내용을 품을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제안이었다고 평가된다. 이때 출품한 작가들의 리스트를 보면 20년이 지난 지금도 현대미술의 주류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도의 감행
여기 대구미술관 <수직충동 수평충동전>(1.9~4.29)이 있다. 전시장은 미술관 2층에 자리 잡은 4, 5전시실에서 열리며 ‘수직’, ‘수평’의 형태적 구별 점을 갖는 작품을 각 전시실에 분리해 설치했다. 좀 더 현장을 묘사하자면 토니 크랙(Tony Cragg)의 <Point of View>(2011)가 전시의 서막을 알리는 역할을 하며 이수경의 <번역된 도자>(2014)가 “‘수직’의 방은 여기”라고 안내하고 있다. 강운의 하늘(<공기와 꿈>(2014))을 고개 들어 보면 본격적인 ‘수직’ 형태를 만날 워밍업은 마친 셈이다. 박석원의 <적의>(1984), 박찬민의 <BL214365198127251931>(2014) 등 쭉 뻗은 수직의 형태를 만날 수 있었다. 더불어 작품의 제목 그대로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것 같은 에너지를 감춘 김인배의 <Rising Fastball>(2010~2011)는 당장 눈앞에 무엇인가 날릴 기세다. yBa(Young British Artist)의 일원인 잉카 쇼비바레(Yinka Shnibare)의 <Cake Kid>(2015)가 언제든지 무너질 불안감을 표명하고 있다면, 쿠리바야시 타카시의 <Reversible>(2012)은 부드러운 안정감을 선사하여 대비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이렇듯 수직의 방은 그 형태의 운명과도 같이 엄격함과 불안감, 질료와 개념 사이의 긴장과 여유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다.
박석원 <적의>(1984)(좌) / 잉카 쇼비바레(Yinka Shnibare) <Cake Kid>(우)
이광호 <집착연작> / 심문필<Untitled>
발걸음을 옮기며 ‘수평’의 방에서는 다소 안정감을 느낄 수 있기를 기대했다. 수직보다 수평구조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본능이기도 하니까! 사실 권부문의 <Untitled>(2008) 연작과 이배의 <Untitled>(2014)에 둘러싸인 리처드 롱(Richard Long)의 <Han River Circle>(1993)을 보기까지는 그러했다. 하늘과 땅, 그것이었다. 익숙한 자연의 모습, 주변의 일상에서 만나는 그 장소를 산책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전국광의 <매스의 내면>(1983)과 이광호의 <집착연작>(2009) 등은 구조의 내밀함과 빽빽한 밀도가 주는 응축의 힘이 층을 이루고 있었고 이는 강한 발산을 암시하는 듯했다. 이는 평온한 기운 하부에 끓고 있으면서 언젠가 임계점에 이르게 되어 터져 나오는 물리적 현상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사실 수직과 수평이라는 구조는 어떻게 보면 매우 수학(數學)적이다. 전시는 물론 현실적인 시각적 현현을 담아내고 있지만, 그 구조는 어떤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즉 기하(幾何)학적 개념에서 수평과 수직은 공간에 대한 인식을 환기한다. 수직의 한 점과 수평의 한 점이 만나는 지점은 집합체가 되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점유를 상상하게끔 한다. 그 지점은 때로는 직선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곡선이 되기도 하며, 평면의 축에 한 축을 더 그어 입체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점의 집합은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규칙을 생성함으로써 형태의 존재 이유를 생성한다. 마치 기하학 문제를 풀 듯이.
권부문 <Untitled>(2008) / 리처드 롱(Richard Long)의 <Han River Circle>(1993)
수직, 수평의 전시장을 시점의 과도한 하향 혹은 상향 이동 없이 거닐면서 강운의 <공기와 꿈>을 극단의 수직 최고점으로, 수평의 전시장을 다니면서 리처드 롱의 <Han River Circle>을 최하향 지점으로 봤다. 다시말해 이번 전시에서 필자의 시선은 삶의 시선과 별 차이점이 없었다는 말이다. 인간을 사랑하여 불 도적질한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직립하게 하여 고개를 들고 하늘의 별과 구름을 보며 상상하라고 부추겼다면, 인간은 땅을 보며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취해야만, 즉 노동해야만 현실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수직충동, 수평충동전>은 그래서 현실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의 굴레와 상상의 세상에서 살기를 욕망하는 시선의 범위에 대한 관찰을 목적으로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대구미술관 소장품전 전시전경(댄 플래빈 <Untitled(fondly to Margo)>(1986))
물론 대구미술관이 이번 전시를 위해 소장품 목록을 갖췄을 리 만무하다. 이는 대구미술관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소장품전을 위해 특정작품을 수집하는 미술관은 찾기가 요원하다. 작품 소장과 그것의 집합인 전시는 사실 그 둘의 접점을 염두에 두고 이뤄진 과정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장품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말 혹은 글에 있어 어휘가 늘어난다는 의미와 같다. 늘어난 어휘는 세련된 표현은 물론 기승전결의 맥락성을 표현하는데 필수조건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대구미술관의 <수직충동, 수평충동전>은 가장 기본적인 조형형태를 바탕으로 기획됐다.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철학을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듯 이번 전시는 미술관이 그간 얼마나 성장했느냐를 관람객에게 피력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미술관 수장고는 그야말로 가장 은밀한 공간이다. 규칙에 따라 출입 자격의 엄격함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라 소장품의 수집과 그것의 보관이 갖는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기에 마치 자신을 보여주는 행위를 매우 조심스러워하는 신중한 이의 습성에 비유할 만 해서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자신의 가장 사적인 비밀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져야 하는 것이 소장품전이라면 <수직충동, 수평충동전>은 대구미술관이 친구를 위해 내밀함을 보여주며 내미는 손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