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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기고 2
어딘가 머무르고 있는 풍경을 찾아서
글_신준민 Painter
대구에서 줄곧 지내왔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간 대구를 중심으로 작가 활동을 하였고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대구의 풍경만을 집중적으로 그리고 있다. ‘대구에는 특별한 풍경이 있어서였을까?’ 스스로 질문해보아도 특별한 점은 없는 것 같다. 단지 나에겐 매일 비슷한 동선을 걷는 일과를 보내다 매번 바라보는 익숙한 풍경이 우연히 새롭게 다가오는 낯선 순간이 존재했다. 그러한 낯섦은 더욱이 나를 미묘하게 끌어당기고 그림으로 표현해가면서 익숙한 풍경으로 되돌려 놓았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대구를 기록하는 측면의 모습이 아닌 대구의 풍경을 눈으로 그려가는 나의 회화 여행기이다.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이 순간, 다소 이른 겨울이지만 밖에는 첫눈이 내린다. 그리고 2013년이 시작된 그해에도 대구에는 흰 눈이 내렸다.
2013-2014년. 달성공원 동물원
2013년 1월 1일. 대구는 온통 흰 눈으로 뒤덮였다. 세상은 온통 흰 눈에 자취를 감추고, 평소에 작업의 소재로 주로 그려왔던 조형적 구조물들은 겨울잠을 자는 듯 적막하고 공허함만이 가득 찼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풍경에 대한 시선은 잠들어 버린 풍경을 깨우지 않고, 오히려 인근의 전시된 자연인 달성공원 동물원으로 발길을 향하게 된다. 당시에는 지상철 3호선, ‘달성공원’역이 없던 시기여서 북성로 오토바이 골목을 지나 찾아갔다.
오랜만에 찾아간 그곳에는 달성공원 입구의 매표소가 옛 모습 그대로 있었다. 텅 빈 매표소를 지나 들어가 보니 동물원에는 눈이 오는 겨울이라 대부분의 동물은 보이질 않았고, 텅 빈 우리와 녹슨 철조망만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니 동물원의 수많은 조형요소는 끊임없이 나를 끌어당겼고, 1년이란 시간 동안은 대구의 달성공원의 산책자가 되어 이곳만을 그리기로 다짐했다.
달성공원 물개사_2013-2014
고요하고 적막함이 가득한 겨울의 동물원을 시작으로 화사한 꽃이 피는 색채로 채워진 봄, 강한 햇살에 무수히 반사되는 수많은 철창살과 그림자가 가득 찬 한여름날, 비가 무수히 내리는 장마철, 해가 진 어둠에 집어삼킨 섬뜩한 밤의 동물원에도 그곳을 찾아갔다. 하지만 1년간의 지속된 산책은 새로움도 가져다주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며 그곳마저 익숙한 풍경이 되어감과 동시에 지루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막바지에는 새롭게 다가오지 않았고, 회화적 표현으로도 무의미한 터치만 남겼다.
Monkey Castle_oil on canvas_145x224cm_2013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1년 동안의 달성공원 산책은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의 회화에 있어서 풍경에 대한 색채를 가져다주었고, 눈앞에 그려진 수많은 철창살로 인해 회화로서의 ‘선’을 인식시켜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공간을 오랜 시간 동안 바라보며 상황에 따라 변해가는 풍경에 대한 시선을 일깨워 주었다.
2015년. 대구 시민운동장 야구장.
평소에 걸어 다닐 때와 다르게 특정 공간에 들어가면 그곳만의 정서에 녹아들게 된다. 그렇게 달성공원과의 긴 시간의 산책 후, ‘조형요소가 많은 곳이 또 어딘가에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애초 특정 장소만을 그리려고 하진 않았지만 이번에는 ‘대구 시민운동장의 야구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날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가 없는 날이었다. 경기가 없다 보니 표를 끊고 들어갈 수가 없어서 발걸음을 되돌리려니 오히려 텅 빈 동물원처럼 텅 빈 야구장의 모습이 궁금했다. 관리 센터의 협조를 구하고 들어가 보니 경기 보러 갔을 때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구조물이 우선적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동물원의 철창살과는 다르게 관중석과 경기장 펜스 사이의 그물망이 있었고, 광활하게 펼쳐진 녹색 잔디와 그 위에 그어진 하얀 선, 반복된 형태로 둘려져 있는 수많은 관람석, 꺼져있는 스포트라이트의 구조와 전광판은 거대한 검은 사각형으로 다가왔다.
어릴 때부터 ‘대구=삼성’을 응원해야 한다는 아버지를 따라 찾아간 야구장은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겐 그저 삼성 라이온즈의 야구 시합를 보러 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작업의 소재로 찾아간 야구장에서는 경기에 대한 내용보다 주변 곳곳을 거닐며 시합이 아닌 그 공간의 구조를 살피고 있었다.
야구 경기가 있는 날에는 관중석은 어느덧 사람들의 다양한 색채로 가득 메어져 의자의 형태는 사라지고 선수들의 응원가와 응원도구의 마찰 소리로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시합의 상황에 따라 야구장의 공기는 고요하다가 환호하였다. 해가 서서히 지며 어두워지는 경기장은 서서히 켜지는 스포트라이트 조명으로 인해 열기를 한층 더 환하고 뜨겁게 밝혔다.
Super Lighting_oil on canvas_363.6×454.6cm_2015
이때 당시 이곳을 바라보며 달성공원의 풍경과 다른 점을 인식하였는데, 관중들의 함성으로 인해 풍경에 소리가 들려왔고, 작업실에 와서 그림을 그릴 때도 야구장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한 소리는 나의 회화에 있어서 점을 찍어가는 붓질을 캔버스에 채워갔다. 이와 동시에 커다란 빛을 뿜어대던 스포트라이트의 빛을 바라보며 연상된 이미지와 기억은 화면상에 비가시적 요소들이 서서히 캔버스에 표현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새로운 장소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풍경 이미지를 그려나간 것도 있지만, 그 장소에 대한 정서를 통해 나의 회화에 새로운 붓질과 형식들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2016년. Everywhere
나에게 2016년은 잊을 수 없는 해이다. 앞만 보고 달려온 작업과 전시는 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허무와 회의로 가득 찼고, 지쳐가는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던 시기였다. 이와 동시에 2013년부터 해온 썬데이페이퍼 그룹 활동은 이 당시에 가장 바쁜 시기였는데 청통에 개관한(2015년) ‘예술공간 거인’과 더불어 2016년에는 삼덕동에 ‘아트클럽 삼덕’이 개관하며 2개의 공간 운영을 그룹에서 하게 되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2014~2015년에 집중적으로 신생 공간이 우후죽순 생겨나며 젊은 작가들이 갤러리, 대안공간의 활동 외에 ‘신생공간’이라는 플랫폼으로 자생적으로 전시 형태를 만들어가며 서로 협업하며 생존해갔는데, 대구에서도 자연스럽게 방천시장 일대와 삼덕동에 공간이 생기며 20~30대 젊은 작가들이 공간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전시 공간의 운영으로 매달 새로운 전시들을 꾸려야 했고, 그때마다 디스플레이와 홍보 선전물을 자체적으로 제작해야 했다.

하지만 바쁘고 힘들었던 시간만큼 좋은 동료 작가들을 새롭게 만날 수 있었고, 열정과 설렘으로 전시를 꾸려가는 젊은 작가들을 바라보며 한동안 회의감에 지친 나 자신에 잊힌 모습을 일깨워주었다. 이와 함께 당시 그룹 활동에서 진행한 ‘썬-프로젝트’를 통해 ‘예술공간 거인’과 ‘아트클럽 삼덕’, 두 곳 동시에 개인전을 여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청통에 위치한 ‘예술공간 거인’은 거대한 냉동창고가 전시장으로 탈바꿈한 공간이었고, 아트클럽삼덕은 아담하고 소박한 가옥의 형태로 나에겐 새로운 경험과 도전이었다.

Everywhere 전시전경_아트클럽삼덕_2016
Everywhere 전시전경_예술공간거인_2016
우선 대구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청통을 가는 길은 심리적으로 상당히 먼 거리였다. 동대구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하양역에 내린 후, 시외버스(와촌 1번)를 타고 청통면사무소 정류장에 내려서 걸어가야 했다. 난 지금도 편한 자가용을 타고 가는 방법보단 오히려 이렇게 가는 방식이 마음에 와닿는다. 기차와 버스 시간에 맞춰서 움직이는 발걸음, 기차 특유의 흔들거림과 함께 들려오는 소리, 청통으로 가는 버스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오고 가는 시간 동안 새로운 감각을 전해 받을 수 있었다.
이때 당시 개인전을 준비하면서는 그동안 진행한 특정 공간(달성공원 동물원, 야구장)처럼 어떤 장소를 지정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일상을 오가는 풍경 속에서 우연히 만나는 풍경과 대상을 소재로 삼았다. 마치 ‘모험’을 하듯 청통과 대구를 오가는 길에 채집된 풍경과 대상들을 지도에 체크하고, 일상을 모험으로 설정하여 반응하는 나 자신과 풍경의 파장에 초점을 두었는데 특별한 소재들이 존재하진 않았고 대부분 평범한 소재들이었다.
작은 음악회_oil on canvas_227x545cm_2016
어떠한 사회적 의미보다 대체로 조형적 특성을 가진 구조물이 캔버스 화면에 그려졌고, 이것은 개인의 정서적 경험 및 기억을 기반으로 재구성되었다. 즉각적인 사진촬영을 통해 일차적으로 이미지가 기록되며 회화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당시의 기억과 감정을 바탕으로 그 대상만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특성을 이끌어내 회화적으로 표현하였다. 풍경에서 파생되는 소리는 보이는 조형으로, 구조적인 형체나 대상은 들리는 색채로 표현하며 기존의 작업보다 좀 더 추상적 요소가 화면에 표현되었다. 그리고 기존에는 온전히 나 혼자만의 감정 표현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이러한 모험을 통한 풍경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새로운 풍경이 되길 바라고 있었다는 점이 어찌 보면 인식의 큰 변화였다.
2017년. 스완송, 그리고 새로운 시작.
Everywhere-마차 설치전경_2017
2013년부터 함께 한 썬데이페이퍼 그룹 활동이 2017년 ‘스완송-마지막 무대’ 전시를 끝으로 그룹을 해체했다. 대구에서 작가 활동을 시작하며 짧은 기간 동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그룹 안에서 다양한 경험을 했다. 이제는 온전히 몸으로 받아들인 그동안의 경험과 감각을 바탕으로 나만의 새로운 무대를 시작해 보려고 한다.
얼마 전, 개인전을 준비하며 새벽에 한창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하루에 먹는 물의 양보다 많았던 캔버스에 쏟아지는 테라핀 용해제는 캔버스에 밀착된 물감을 모두 쓸어내렸고, 그 속에서 수많은 색은 섞여갔다. 손에 들려있는 물감이 듬뿍 발린 붓을 캔버스에 비벼가니 잔잔히 코를 찌르는 냄새가 작업실에 퍼져갔고, 캔버스에 붓이 칠해질 때마다 날카로운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작업을 마치고 붓을 씻기 전, 붓과 팔레트에 남겨진 물감이 아까워서 빈 벽과 빈 캔버스에 무작위로 칠했다. ‘어떤 풍경이나 이미지를 그려야겠다.’라고 생각하고 그린 것보다 훨씬 감각적으로 보였다. 순간 손이 원망스러웠다. 붓을 들었을 때보다 붓을 놓을 때 더 그림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붓을 잡고 그렸지만, 의식한 순간 그 감각은 그렇게 사라졌다.
생각해보면 풍경도 찾으려고 하면 보이질 않았다. 바쁜 일상 속에서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그리고 또 그리다 보면 새로운 회화적 감각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을까?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설렘과 기대감을 안고 흰 캔버스를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