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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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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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interview
‘비디오아트 선구자 박현기’
기억속의 친구 박현기
인터뷰이_최병소 작가
인터뷰어_김지윤 갤러리분도 큐레이터
김지윤 : 선생님! 우선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인터뷰는 박현기 선생님 작품에 관한 이야기 보다는 대구에서 함께 활동한 지인이자 혹은 친구로서 기억하는 박현기 선생님에 대해 들어보고자 합니다.
최병소 : 내 기억에 현기는 술도 많이 마시고 고기도 정말 좋아하고, 하여튼 대식가였어요. 그래서 현기랑 술을 마시면 항상 상차림이 푸짐했습니다. (웃음) 술을 참 좋아했는데 그나마 간 건강은 걱정되어 미리 검사도 받고 조심하긴 했었어요. 대신 위가 탈이 났는지는 몰랐죠. 발병 나고 난 뒤 얼마 안 돼서 갔으니까요.
김지윤 : 안타깝습니다. 건강만 잘 관리하셨어도 예전처럼 함께 활동하실 수 있었을 텐데요.
최병소 : 내가 종종 현기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은 적이 있는데, 그땐 밥상 차림이 크게 푸짐하다기보다는 검박한 차림이었어요, 나물에 국에. 대식가 현기의 과식을 염려한 사모님의 알뜰한 마음이 담겨있었습니다.
박현기_1990년대 후반(추정) / 사진제공_국립현대미술관
김지윤 : 박현기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시 상황이나 기억에 남는 것들이 있으신가요?
최병소 : 내가 현기와 실제로 같이 활동했던 건 1970년대쯤입니다. 미대를 졸업하고 백수로 있었던 시기였어요. 나뿐만이 아니라 이강소 등 당시 동료들이 다 그랬었죠. 매일 만나 술 마시고 이야기 하고 그게 일이었어요. 술 마시면서 벌인 굿판이 당시 대구현대미술제 같은 그런 것이었거든. 좀 더 재미있게 벌릴 작정으로 서울사람들도 불러들었죠. 서울대학교 나온 이강소가 <신체제> 멤버를 그리고 홍대 나온 황현욱이가 멤버를 모았어요.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게 대구현대미술제예요. 현기와 만나 전시나 작업에 대해 논한 건 아마 그 무렵입니다. 실은 알고 지낸 지는 더 오래 전이였어요, 고3 때쯤이니까.
김지윤 : 그럼 작품 활동 하시면서 알게 된 사이가 아니시네요?
최병소 : 그렇지! 난 대건고등학교 나왔거든. 현기는 대구공고를 다녔었는데 그땐 그림 그린다고 미술도구 들고 대건고에 놀러 왔어요. 근데 실상 그림 때문에 왔다기보다는 바로 옆에 있었던 효고(현, 대구효성여자고등학교) 때문에 온 거 같아요.(웃음) 현기는 고등학교 때 연애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현기는 홍대로 가고 난 중앙대로 갔죠. 그때는 학교거리도 멀고 해서 서울 올라간 이후로 현기를 만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대구와서 작가들 끼리 만나는 자리에 박현기가 나타난 거지.
김지윤 : 그럼 그때부터 전시도 종종 함께 하시고 작업에 대해 공유하셨겠네요.
최병소 : 현기는 학교 다닐 때 회화과 공부하다가 나중에 건축학과로 전공을 옮겼어요. 당시 형편 때문에 돈도 벌었어야 됐으니까. 생각해보면 그건 잘 한 거 같아요. 아니면 우리처럼 졸업한 순간부터 백수 였을 테니까요. 대구로 돌아와서 「큐빅」이라는 인테리어 사무실을 차려두고 돈을 벌기 시작했는데, 우리와는 차원이 달랐어요. 돈을 잘 벌었습니다. 그래서 현대미술제 같은 행사 때 필요한 돈들을 현기가 많이 지원해줬어요. 현기는 대인관계가 참 좋아서 서울뿐만 아니라 일본 같은 곳에서도 손님이 오시면 다 접대하고 그랬죠.
김지윤 : 한국뿐만 아니라 외국 손님맞이 같은 일들을 감수해내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최병소 : 행사 때는 손님들 모시고 한일호텔에 가서 술 마시면서 대화도 하고, 춤추고 그렇게 보냈죠. 그러면서도 현기는 작업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우리 모임에 빠지는 일이 없었어요. 자신만의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다가 비디오카메라를 장만하고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죠. 그때만 해도 동영상이라는 매체는 미대에서는 아예 취급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어요. 만일 현기가 건축가로 전공을 바꾸지 않고 회화과로 그대로 졸업했다면, 아마 지금의 박현기 작업은 없었을 겁니다. 기존의 개념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테니까요.
김지윤 : 오히려 전과한 것이 다른 작가들과 남다를 수밖에 없는 계기였겠네요.
1980년 박현기 참여 《제11회 파리비엔날레》 현장 슬라이드_제11회 파리비엔날레 참가당시 파리 호텔에서(사진_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최병소 : 그랬죠. 그땐 움직이는 그림이 없었고 미술이란 항상 고정되어 있다는 개념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러다 백남준 작가의 영상을 알게 되면서 작업도 막 움직이기 시작했지. 획기적이였어요. 만일 현기가 회화를 계속했다면 그런 작업을 못 했을 것 같아요.
김지윤 : 당시 백남준 선생님의 작업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작가들이 비디오라는 새로운 형식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박현기 선생님 또한 마찬가지고요.
최병소 : 현기도 새로운 방법을 고심해보다가 돈도 있으니 시도해봤던 것 같아요. 그때는 작가마다 자신만의 기법이랄까 방법들이 있었죠. 현기도 자신만의 방식을 찾기 위해 고민하다가 영상을 접했고요. 그 시대에 비디오카메라를 장만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웠어요. 굉장히 비쌌으니까요.
그렇게 장만한 기계로 돌도 찍고 물도 찍고,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런 작업의 시초가 된 것들이죠. 그리고 백남준 선생이 박현기를 종종 만나기도 했고 인정도 했었죠. 이유는 모르지만 현기를 부를 때는 꼭 ‘박서방~박서방’ 이렇게 불렀었어요.
김지윤 : 그럼 두 분이 서로 에피소드 같은 것이 있으셨나요?
최병소 : 백선생이 현기에게 “박서방~! 나는 부처를 찍을 테니 자네는 돌과 물을 찍어~! ” 라고 이야기하곤 했죠. 현기 작업에 돌이나 물 같은 자연소재가 등장하는 것도 20세기 동양 작가들이 평면에 사용하던 소재를 그대로 영상작업에 적용했던 겁니다.
그땐 레디메이드나 인쇄매체 같은 작업이 유명했었지만, 동양작가들은 자연물을 가지고 작업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물이나 돌 같은 것으로 오브제 미술을 했다고 봐야죠.
김지윤 : 그럼 작업을 위해 서울이나 다른 곳으로도 많이 다니셨겠네요?
최병소 : 현기는 작업 때문에 여기저기 많이 다녔죠. 종종 전람회 할 때 서울을 많이 갔었어요. 그땐 KTX 같은 것이 없었던 시절이니까 완행열차(무궁화호) 같은걸 타고 한참을 갔는데 현기는 내내 줄담배를 피우면서 종이 위에 에스키스를 했어요.
김지윤 : 다른 작가 분들도 그러셨겠지만, 박현기 선생님이 작업을 대하는 태도는 좀 남달랐네요. 뭔가 적극적이고 자신감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1980년 박현기 참여 《제11회 파리비엔날레》 현장 슬라이드_제11회 파리비엔날레 출품작 앞에서, 1980
최병소 : 그랬죠. 에스키스 하던 것을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으면, 내가 본다는 것을 알고는 더 적극적으로 보여주면서 토론했어요. 여유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나 하면 작가란 방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어요. 작가마다 예술을 표현하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작업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것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현기는 작품이 나올 때까지 에스키스를 끝까지 붙들고 있었거든. 작업을 대하는 태도로 보자면 근성이랄까…참 중요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김지윤 : 이 친구는 작업을 해야 되는 친구구나, 그런 생각을 하셨겠네요.
최병소 : 네~그러다가 IMF가 터졌어요. 내 생각에 현기의 작업은 IMF가 터지기 전과 그 후로 딱 나뉜다고 봐요. 그 전에는 건축사무소를 운영했기 때문에 작업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었죠. IMF 때문에 큐빅이 망하면서 사무소 인력을 동영상 작업팀으로 끌어왔죠. 거기에는 머리 좋은 친구들이 많았어요. 이 시기에 작업이 많이 바뀌었어요. <만다라>, <도시의 지하철에서>와 같은 작품들이 탄생한 게 그때쯤이니까요.
김지윤 : 사업은 망했지만, 그 일이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거네요.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작품들도 남길 수 있었고요.
최병소 : 그렇지! 사업가로는 망했지만, 예술가로는 살아남았죠. 박현기의 전성시대가 시작된 거지. 그러다가 몸이 망가진 거예요. 그때는 작품도 좀 유명해지고 팔리기도 했었는데 그러다 건강이 그렇게 됐죠.
김지윤 : 그럼 박현기 선생님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은 언제쯤 아시게 된 건가요? 예전에 읽은 기사 중 아트센터 나비 개관전 <멀티미디어 아트 프로젝트>전시 때 박현기 선생님이 암 투병 중이라는 말씀을 주변에 일절 하시지 않고 작품 구상부터 설치까지 직접 관여하셨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최병소 : 어느 날 보니 종종 얼굴이 창백해지고, 잘 넘어졌었어요. 걱정이 돼서 병원에 가보라고도 했었죠. 근데 “뭐, 괜찮아~괜찮아~” 했었어요. 시간이 좀 지나 결국 부인이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갔는데, 그땐 이미 진행이 많이 됐을 때였어요. 요즘은 의술이 좋아서 암도 고치지만 그것도 너무 늦으면 못 고치잖아요. 그런데도 현기는 작업을 계속했었어요.
하루는 내가 현기를 찾아갔었는데 대뜸 생년월일을 물었어요. 가르쳐주니까 그다음은 지장을 찍으라고 해서 그냥 찍긴 했었는데, 그게 나중에 작품이 되었어요. 내 주민등록 숫자랑 지장이 찍힌 걸 영상으로 찍어서 작업으로 편집하고 영상작품으로 만들었죠. 이후 병세가 더 악화됐을 때는 주로 집에서 기체조를 했었어요. 그땐 몸이 참 많이 야위었었는데, 체조하는 모습을 촬영했더군요. 나중에 보니 그 작품이 광주비엔날레에 유작으로 소개되었어요.
김지윤 : 죽음을 앞두고 계속 작업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박현기 선생님의 열정이 정말 대단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삶을 열정적으로 사셨을 것 같아요.
최병소 : 현기는 우리와 출발이 달랐어요. 머리도 좋아서 건축과로 가서 돈을 벌고 다시 자기가 하고 싶은 작업을 했으니까. 순수 미술 한다고 세상 물정 모르고 지낸 나와도 달랐고요. 참 멋쟁이였어요. 옷도 잘 입고 사람들과도 잘 친해지고 그랬지. 맥주나 양주 같은 술을 좋아했는데 거나하게 들어가면 18번으로 곧잘 부르던 노래도 부르곤 했죠.
김지윤 : 노래도 잘하셨나봅니다.
최병소 : 노래 잘했지! 노래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다 잘한 팔방미인이었습니다. 여자들한테도 인기가 많고(웃음) 생각나는 게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돈 있으면 돌라고 했어요. 어디 필요하냐 해서 물으면 그냥 달라고 해서 주면 바로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데이트 신청하고, 그래서 인기도 많았어요. 보통 그렇게 만나려면 외모도 출중해야 하고 말도 잘해야 되는데 현기는 그런 능력도 좋았어요. 난 그런 것 잘 못 해서 오죽하면 주변 지인이 ‘최병소는 미국사람보다 한국말을 더 못 한다’ 그런 말도 했었으니까. 내가 술도 잘 못 마셔서 더 친숙하게 사귀진 못했지만, 그래도 동료로서 친구로서 잘 지냈습니다.
김지윤 : 두 분이 참 성향이 다르셨네요. 오히려 성격의 다름에서 오는 호기심이 두 분을 친구로 만든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서로 작품에 관해서는 이야기 하시진 않으셨는지?
최병소 : 처음에는 내 작업을 부러워했었어요. 난 70년대부터 나만의 방식을 찾았고 화단에 일찍 데뷔했었죠. 그때 현기는 비디오 캠코더 구해서 작업을 시도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현기 작업을 보고 느낀 게 뭐냐면 작업은 방법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술가의 자세라 생각해요. 그래서 예전부터 현기에게 작업이 좋다는 말을 했어요.
김지윤 : 2013년에 진행된 <대구현대미술제>(주관 : 대구문화재단) 전시 당시 최병소 선생님 인터뷰 중 ‘미대를 다닐 때도 미술에 그렇게 흥미를 안 가지고 있었는데, 70년대 중반 미대를 갓 나온 친구들이 모이면서 그때부터 미술에 관심을 끌게 된 거야. 친구들 때문에 가능했지요’ 라는 내용이 인상 깊었습니다. 최병소 선생님께 박현기란 어떤 친구였는지 궁금합니다.
최병소 작가의 작업실 인터뷰
최병소 : 박현기는 좋은 동료였어요. 때론 나한테 일종의 자극을 주기도 하는 친구였죠. 작품이 될 때까지 밀어붙이는 근성, 그런 것들을 보면서 자극받고 했었어요. 아마 현기가 살아있었다면 비디오아트에 획기적이면서 새로운 지평을 보여 줬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