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공감

목차보기
Print Friendly, PDF & Email
대구문학의 지문을 살피며 걷는 길
– 대구문학로드 –
글_강민희 대구한의대학교 조교수
1. 의미의 폭과 깊이가 깃든 당신과 나의 장소
루카치(György Lukács)는 “길은 시작되었는데도 여행은 완결된 형식”1)이라는 말을 통해 ‘길’이 개인이 도달할 수 없는 초월적 공간으로 상정되어 왔음을 밝혔다. 그러나 이 말은 문학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네 삶이란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한 과정과 그에 따른 노력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삶을 반영한 문학이 ‘길’과 그 위에 선 인물의 여정을 통해 인생을 드러내고, 시대를 이야기하며 그로써 인간의 존재론적 전환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주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길’은 이런 상찬을 받는 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다기(多岐)한 정보가 다양한 방법으로 축적되고, 이를 지속적으로 활용하며, 소통을 통해 확산되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기 때문이다.2)
대구의 길은 어떠한가? 대구의 길은 지역의 형성과 성장의 공간으로 운위되면서 지역문화가 발현․존속하는 토대로 기능해왔고, “천 개의 골목, 천 개의 이야기”가 숨 쉬고 성장하는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중구의 골목길은 근현대의 문화, 예술, 역사가 발아했다는 점에서 애호가들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하고, 그 내면에 생활사적 향취가 가득하다는 점에서 남녀노소가 친근함을 느낄 수 있다. 대구읍성과 경상감영공원, 일제 강점기의 가로구획 등에 기초하여 형성된 도시공간의 구조며 급격한 도시성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가로 골격의 원형이 비교적 잘 유지되어 있다는 점도 자랑거리 중 하나다. 요컨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켜를 달리하며 사람들의 기억이 축적된 독특한 문화적 가치를 가진 장소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2. 대구문학의 손금, 대구문학로드를 거니는 발걸음
대구의 ‘골목’이 대표적인 관광자원으로 성장하는 동안 ‘문학’은 성장의 요체로 기능했다. 이러한 성격이 여실히 투영된 길이 ‘대구문학로드’다. ‘대구문학로드’는 대구와 관련된 문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도보여행을 떠나는 투어프로그램이라고 범박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이 길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결코 범박하지도, 단순하지도 않다는 것을, 오히려 “한국문학의 요람”인 지역정체성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히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콘텐츠라는 사실을 말이다. 함께 걷는다는 상상을 하며 살펴보자.
먼저 A코스다. ‘근대문학의 태동’이라는 주제를 가진 해당 코스는, 1900년대부터 1940년대 사이에 활동한 문인예술가의 흔적이 가득하다. 대구예술발전소에서 출발해 수창동, 인교동, 계산동으로 이어지는 이 골목길은 “발길 닿는 길마다 대구문단의 숨겨져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하나, 이는 겸손에 가까워 보인다. 「백조」와 「거화」로 한국현대문단과 대구문단의 시작에 기여한 이상화가 숨을 쉬던 길이자, 세속적인 것을 싫어하여 고독하게 살던 이장희가 숨을 거둔 길. 만주와 중국을 떠돌다 해방과 함께 이설주가 돌아온 곳이자, 신동집이 휴머니즘의 본령을 고구(考究)하던 길.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예술혼을 불태운 이쾌대와 ‘조선의 고갱’이라고 불렸던 이인성이 걸었던 길이기 때문이다. A코스는 “한국의 현대문화예술이 시작된 길”로 불려야 할지도 모른다.
A코스의 시작점, 대구예술발전소(좌) / 대구의 골목길을 걸어다녔을 이상화(우)
한편 대구문학관에서 시작되는 B코스는 여러 문인과 화가들의 흔적과 일화가 생생히 살아있는 향촌동과 북성로 일대로, 1920년대부터 1960년대 사이의 ‘전쟁기 문학예술의 교류’를 주제로 한다. 임시수도에 후방이었다고는 하나,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었던 만큼 당시의 대구는 가난과 고통, 절망 등의 감정이 팽배했다. 그러나 최정희가 ‘정든 곳’으로, 고은이 ‘괴롭고 즐거웠던 곳’으로 기억할 정도로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종군문인들’이 있다. 이들은 ‘문화극장’, ‘만경관’, ‘상고예술학원’과 같은 대구의 다양한 문화공간에서 전쟁의 아픔을 작품으로 승화했다. 앉아서 글만 쓴 것도 아니다. ‘말대가리집’, ‘석류나무집’, ‘감나무집’처럼 값싸고 외상값 독촉을 하지 않는 대폿집에 몰려다니며 술을 마시고, 유행가를 부르면서 피난살이의 고된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3)
‘향촌동 귀공자’ 구상과 조지훈은 오늘날의 대구가톨릭대학교인 효성여대에서 수업을 하기도 했다. ‘우비교수’로 불린 조지훈은 비오는 날만 볼 수 있었다지만 말이다.2)
B코스의 시작, 대구문학관(좌) / 문인들의 향촌동, 북성로(우)
이중섭, 은지화 그리고 백록다방(좌) / ‘향촌동 귀공자’를 만나는 화월여관(우)
‘대구문학로드’를 돌아보는 동안 ‘길’의 의미를 그곳을 거닌 사람의 마음대로 도출할 수 있다면, 이 길을 대구문학의 손금이라고 부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금은 손바닥에 난 잔금에 불과하지만, 때로는 이것으로 과거를 가늠하고, 지금을 맞출 수 있으며, 내일을 예견할 수도 있다. 수상가 앞에서 손을 내밀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들이 내 손바닥 위를 가로지르는 옅은 선을 이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해내는지 말이다. 그뿐인가, 손금은 끊어진 것처럼 보일 정도로 아주 얇고 흐려지기는 하지만 결코 혼자 떨어져 있지 않다. 결국은 다른 손금과 만나 끝끝내 이어지고 만다. ‘대구문학로드’가 대구문학의 ―어쩌면 한국문학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가늠케 하는 것처럼,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골목길 위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여전히 누군가의 입을 빌려 전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3.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대구문학로드’에 대해 한참 궁리하다보면, ‘길’을 활용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지역의 발전을 촉진하고 지역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에 있어야 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실 ‘길’의 조성과 운영이 가치를 준거기준으로 삼아야 하고, 노후화되고 효용성이 떨어지는 공간을 새로운 목적과 기능에 따라 의미를 재구성하고 시대적 변화와 요구 앞에서도 또렷하게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함은 주지의 사실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길’을 활용한 관련 사업이 이전의 것을 반복하거나 약간의 아이디어를 보태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선점 또는 선전의 효과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에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길’의 본질을 파악하고 회복함으로써 지속가능성과 진정성을 담보하는 일이 우선 이루어져야 한다. 본질을 잃어버린 ‘길’과 그 위에서 이루어지는 특화거리 조성사업은 모조품이나 키치(kitsch)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본질을 훼손할 우려마저 없지 않다. ‘길’에 지역민의 역량이 깃들어 변화에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신중한 대안을 마련할 자생력을 갖출 수 있는 방법도 요구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구문학로드’는 ‘길’에 켜켜이 쌓인 이야기를 수집하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과정이며, 지역민이 스스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확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사례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다.
이제 우리는 ‘길’이 “노스텔지어(nostalgia)”로 불리면서 주목받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해야만 하는 시기를 맞았다. 그 답은 ‘길’의 미학성을 기억할 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길’의 아름다움은 특이한 건축물이나 ‘맛집’을 통해 마련되지 않는다. 오히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노스탤지어에 의해서 보장”되고, “한국의 폭력적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된 사람의 삶의 공간”
요컨대,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과 삶의 이야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길’의 노스텔지어를 이야기하는 자리에 우리의 ‘대구문학로드’는 또 어떤 가능성을 보여줄 것인가?
함께, 내내 지켜볼 일이다.
  • 1)게오르그 루카치, 반성완 옮김, 「소설의 이론」, 심설당, 1985, 94쪽.
  • 2)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말한 것처럼 사회가 정주형(定住型)에서 유목형(遊牧型)으로 바뀌는 측면도 적지 않다. 그러나 장소를 부정하고 ‘유목’으로 운위되는 이동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쉬지 않고 움직이는 존재이며, 건축은 사건의 연속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장소에 구속되지 않고 이동환경에 대응하는 ‘보행도시’나 ‘인스턴트도시’는 여전히 일상의 영역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 3)이들은 ‘문화극장’, ‘만경관’, ‘상고예술학원’과 같은 대구의 다양한 문화공간에서 전쟁의 아픔을 작품으로 승화했다. 덕산동에 자리하고 있던 ‘공군홀’에서는 ‘공군종군문인단’의 단원들이 조종사들과 모여 함께 생활하면서 종군기를 작성했다. 종군문인들은 덕산동의 어느 2층집 ― 난로도, 불기도 없는― 방에 모여 전쟁소설과 종군시를 창작하기도 했다. ‘말대가리집’, ‘감나무집’, ‘석류나무집’으로 대표되는 술집과 ‘녹향’, ‘향수’, ‘르네상스’, ‘모나미’, ‘살으리’, ‘상록수’, ‘백록’ 등의 다방과 ‘대구공회당’ 등은 당대 종군문인들이 즐겨 찾았던 대구지역의 명소라고 할 수 있다.
  • 4)「이수남의 되돌아본 향토문단 13 ― 시인 최선영」, 「영남일보」, 2005.06.23.
  • 5)김홍중, 「골목길 풍경과 노스탤지어」, 「경제와사회」 통권 제77호, 한국산업사회학회, 2008, 1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