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백화는 이래뵈두 인천 노랑집에다, 대구 자갈마당, 포항 중앙대학, 진해 칠구, 모두 겪은 년이라구.”
그러나 북성로가 원래부터 이렇게 거친 공간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 북성로는 대구 최초의 신작로가 열린 곳이자, 혼마치(本町)라고 불리던 동성로와 더불어 모토마리(元町)로 불리는 대구의 중심지였다. 일본에서도 유명한 체인 백화점이었던 미나카이가 최초로 대구에 진출한 곳도, 담배공장인 연초제조창이 있던 곳도 북성로였다. 이 시기의 북성로에는 목욕탕인 조일탕, 재림소와 재목소, 포도주 판매점과 장신구점, 곡물회사, 철물점, 양복점, 조경회사 등이 포진한 ‘모던’의 물결이 넘실대던 곳이라 할 수 있다. 벽돌로 지은 근대식 건축물 사이에 마치야 라고 부르던 일본인들의 상가주택이 빽빽이 들어찬 번화가였다. 그래서 북성로는 당시 긴자(銀座)라고 불렸다. 대구에 거주했던 일본인의 수가 1만 3~4천명이었고 그들의 쇼핑과 생활의 중심지였으니 그 세련됨과 번화함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근 10년의 세월을 외국에서 지낸 후 돼지골목에 술 한 잔 하러 가면서 우연하게 들린 북성로의 모습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이전의 활기와 야성은 사라져 버렸고, 몇 집을 제외하면 장사조차 여의치 않아 보이는 조그마한 가게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낡은 거리로 변해있었다. 예전에는 거리를 메웠던 자동차와 사람에 가려 보이지 않던 골목의 낡은 집들도 눈에 들어왔다. 거리의 풍경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때 나는 북성로의 공방, 그 공방의 선반 밑에 켜켜이 쌓여있던 쇳가루를 떠올렸다. 선반 밑의 쇳가루처럼 퇴적되어가는 시간 속에 북성로도 역사의 한 자락으로 쇠락해 갈 것이라고 여기고는 애석해하면서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정말 그럴까? 뚜벅뚜벅 걸었던 오늘의 북성로는 어땠던가? 1960년대 즈음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던 그 길은 고요히, 그리고 확실히 바뀌어 있었다. 기계소리와 공구상들의 목소리가 줄어든 자리에 문화와 도시재생이라는 슬로건이 자랐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물론 외양도 변했다. 대구시에서는 북성로 축제를 개최하고, 가로를 정비했으며, 순종황제 어가길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발굴해 오늘의 얼굴을 만들어냈다. 덕분에 이 길은 어른들의 공간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트렌디할 뿐 아니라, 고상한 문화의 향취마저 감도는 곳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그 중심에 북성로의 복합문화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우선 북성로 공구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재생되고 있는 북성로의 랜드마크이자 거점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1930년대 지어진 일본식 미곡창고에 증축되어 있던 건축물을 제거하고, 리노베이션하여 공구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삼덕상회의 전신인 철원상회 등과 같은 북성로의 노포들로부터 천여 점에 가까운 물품을 기증받아서 전시하고 있다. 안쪽다락에는 당시 공구상들의 사무실을 복원해 두어서 현실감을 높이고 있다. 2층은 북성로 재생을 비롯한 다양한 교육과 문화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사)시간과 공간연구소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아트공방과 카페도 함께 겸하고 있다.
두 번째는 더 폴락이다. 이 서점은 2012년에 설립된 대구 최초의 독립출판물 서점이다. 원래 대명동 계명대학교 캠퍼스 부근에 있다가 북성로로 이전해왔다. 본업인 출판 외에 인디뮤지션 공연, 토크 콘서트, <아마도 생산적인 활동>이라는 소규모 페스티벌을 통해 창작자와 독자들의 직접 만남을 진행하면서 북성로의 문화플랫폼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최근에는 대구예술발전소 옆 구 전매청아파트를 개조한 청년창작공간에서 <일시적 점거: 그곳에 작은 책방이 있다>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 프로젝트는 더 폴락을 비롯한 고스트북스, 책방이층, 커피는 책이랑, 하고 책방 등과 같은 대구의 작은 서점들이 함께 기획하고 진행하며, 토크프로그램과 노래가 된 책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를 노래로’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세 번째로 cafe 삼덕상회는 알려진 바와 같이 ‘북성로 재발견’ 프로젝트의 첫 결실로 문을 연 카페이다. ‘북성로 재발견’ 프로젝트는 대구지역의 건축가, 미술가, 인문학자 10여명으로 구성되어 북성로의 근대건축물을 보존하여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문화공간으로 조성하는 사업이었다. cafe 삼덕상회의 건물은 1930년대 지어진 일본식 상가주택을 리노베이션하여 2011년 10월 27일 문을 열었다. 이 자리는 원래 1953년 철원상회라는 철물점이었고, 후일 삼덕상회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그 이름을 그대로 계승하여 과거와 현대가 공존한다는 의미를 강조하였다.
이처럼 북성로에 자리잡은 여러 복합문화공간은 출판, 교육, 체험, 휴식 등의 다양한 문화활동을 진행하고 있고, 나름대로의 특성도 지니고 있다. 이들의 존재 덕분에 북성로 거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복합문화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하겠다.
존속하고 있는 업종도 문제가 되고 있다. 진골목이나 방천시장의 경우 요식업이 대부분이었고, 관광객이 몰리면서 지역민과의 협력, 상생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었다. 진골목 인근의 약전골목 역시 관광객의 증가가 한약재의 구매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근대골목사업에 협조적이다. 그러나 북성로의 주업종은 공구이다. 일반인들, 특히 관광객들의 구매욕구를 자극하기 어려운 상품들이고, 이 경우 지역민들은 도시재생에 관심이 없거나 오히려 적대적일 수 있다. 예컨대 얼마 전 중구청에서 실시한 가로 정비 및 차로의 통행조정은 상인들로부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지난 10월 23일에서 27일까지 열린 북성로 축제에서 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손으로 만드는 미래’라는 주제 하에 개최된 2017년 북성로 축제는 설정에서부터 북성로의 현대적 정체성을 담고 있었다. 특히 사람재생프로젝트를 주요한 사업방향으로 제시하면서 북성로를 지켜온 장인들의 사진과 이야기를 전시한 것은 현대적 요소인 지역민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을 통해 콘텐츠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람재생프로젝트를 발전시켜서 북성로 장인들의 이야기를 공구박물관 등에 지속적으로 전시하고, 이 이야기를 중심으로 공업전공 고교생이나 대학생들의 견학과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하면 어떨까? 장인의 거리로서 북성로의 정체성을 부각시키고, 지속적으로 관람객을 유치하며, 현재의 업종과 맥락이 통하고, 지역민들이 진정으로 참여하는 북성로 재생이 이루어 질 수 있지 않을까?
지금도 북성로에 가면 어린 시절 보았던 수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 사람들이 있었기에 북성로가 현재까지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떠난 사람, 남아있는 사람을 어떻게 다시 이 길에서 만나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이 길이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