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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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성로와 복합문화공간
북성로 : 길의 새로운 도전을 말하다
글_이승우 대구한의대학교 교수
북성로를 걷기 전 당신이 알아야할 몇 가지
어린 시절의 내게 북성로는 금기의 땅이었다. 보다 명확히 말하면 어른이 되어야 갈 수 있는, 어른만 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어린 시절 우연히 본 북성로의 풍경 때문이다. 당시의 북성로는 지금처럼 깨끗하게 정리된 가로가 아니었다. 자동차와 오토바이, 자전차로 불렸던 자전거가 뒤엉켜 주차돼 있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어깨를 벗어젖힌 공구상인들이 분주하게 공구를 날랐고, 흥정을 붙였으며, 때로는 언성을 높였다. 이 풍경에 어린 아이가 끼일 틈은 없었다. 어린아이의 작은 몸 하나 끼워 넣을 틈이 물리적으로야 왜 없었을까. 그러나 그랬다. 이 생각은 두 번째 이유와도 연결됐다.
발걸음을 조금만 옮기면 스쳐지나간 어른들이 거칠게 욕망을 소비하던 공간이 나왔다. 향촌동에는 술집이 즐비했다. 고교시절 학교가 멀어서 대구역 앞이나 중앙로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던 나는 친구들과 향촌동 언저리를 서성이곤 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초입을 서성였을 뿐, 발을 들이지는 못했다. 우리가 어깨 좀 펴고 다녔던 동성로와는 냄새부터 달랐으니까. 지금의 대구역과 시민회관 맞은편으로 난 좁은 골목길 속에는 여인숙이 빼곡했다. 이 길은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에도 언급된 자갈마당과 연결돼 거대한 관능의 벨트를 형성했다. 동행한 이가 웃는다, 저길 보라고. “청소년출입금지구역”이라는 글자가 흰색 페인트로 바닥에 적혀 있다. 여전히 이 길은 청소년들에게는 출입조차 제한돼 있다.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서는 소설의 한 대목을 읊조렸다.

“나 백화는 이래뵈두 인천 노랑집에다, 대구 자갈마당, 포항 중앙대학, 진해 칠구, 모두 겪은 년이라구.”

그러나 북성로가 원래부터 이렇게 거친 공간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 북성로는 대구 최초의 신작로가 열린 곳이자, 혼마치(本町)라고 불리던 동성로와 더불어 모토마리(元町)로 불리는 대구의 중심지였다. 일본에서도 유명한 체인 백화점이었던 미나카이가 최초로 대구에 진출한 곳도, 담배공장인 연초제조창이 있던 곳도 북성로였다. 이 시기의 북성로에는 목욕탕인 조일탕, 재림소와 재목소, 포도주 판매점과 장신구점, 곡물회사, 철물점, 양복점, 조경회사 등이 포진한 ‘모던’의 물결이 넘실대던 곳이라 할 수 있다. 벽돌로 지은 근대식 건축물 사이에 마치야 라고 부르던 일본인들의 상가주택이 빽빽이 들어찬 번화가였다. 그래서 북성로는 당시 긴자(銀座)라고 불렸다. 대구에 거주했던 일본인의 수가 1만 3~4천명이었고 그들의 쇼핑과 생활의 중심지였으니 그 세련됨과 번화함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북성로가 사내들의 공간이 된 것은 일본이 패망한 후인 1940년대 후반이다. 미군정 시절인 1947년 11명의 공구상인들이 달성공원 앞(지금의 인교동골목)에서 미군부대 폐공구를 수집하여 재생공구를 팔기 시작했다. 이것이 공구골목으로서 북성로의 시초였다. 따라서 북성로 공구골목의 시작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중부경찰서 뒤편이 아니라 달성공원 앞의 중기골목 어디쯤 이었던 셈이다. 이후 근대화를 상징하던 기계공업의 발달로 국산공구를 판매하는 가계가 모여들고, 기계를 제작해주던 기술자들이 모여서 공방을 차리면서 북성로는 공구전문 거리로 부상했다. 또한 공구상들이 많아지면서 서성로를 넘어 중앙로까지 진출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구역 앞 중앙로에서 달성공원 앞까지 이어지는 집단 상가가 형성되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근 10년의 세월을 외국에서 지낸 후 돼지골목에 술 한 잔 하러 가면서 우연하게 들린 북성로의 모습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이전의 활기와 야성은 사라져 버렸고, 몇 집을 제외하면 장사조차 여의치 않아 보이는 조그마한 가게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낡은 거리로 변해있었다. 예전에는 거리를 메웠던 자동차와 사람에 가려 보이지 않던 골목의 낡은 집들도 눈에 들어왔다. 거리의 풍경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때 나는 북성로의 공방, 그 공방의 선반 밑에 켜켜이 쌓여있던 쇳가루를 떠올렸다. 선반 밑의 쇳가루처럼 퇴적되어가는 시간 속에 북성로도 역사의 한 자락으로 쇠락해 갈 것이라고 여기고는 애석해하면서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북성로, 그 의미의 집합체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았던, 부분적이지만 실제로 그랬던 북성로의 존재감이 다시 부각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존재감의 근거다. 나는 이 근거를 SNS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북성로를 검색해 본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청춘들의 북성로 답사기와 인증샷, 무수한 내일로 일정표가 보이지도 않는 공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청춘들의 포스팅을 보노라면 대구에서 가장 Hip한 것들은 죄다 북성로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그럴까? 뚜벅뚜벅 걸었던 오늘의 북성로는 어땠던가? 1960년대 즈음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던 그 길은 고요히, 그리고 확실히 바뀌어 있었다. 기계소리와 공구상들의 목소리가 줄어든 자리에 문화와 도시재생이라는 슬로건이 자랐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물론 외양도 변했다. 대구시에서는 북성로 축제를 개최하고, 가로를 정비했으며, 순종황제 어가길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발굴해 오늘의 얼굴을 만들어냈다. 덕분에 이 길은 어른들의 공간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트렌디할 뿐 아니라, 고상한 문화의 향취마저 감도는 곳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그 중심에 북성로의 복합문화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문화는 북성로의 새로운 얼굴이 될 수 있는가?
복합문화공간이라는 말을 들었을때 거창하고 규모가 큰 공간을 연상하기 쉽지만 북성로의 복합문화공간은 그리 크지 않다. 대신 아기자기하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우선 북성로 공구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재생되고 있는 북성로의 랜드마크이자 거점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1930년대 지어진 일본식 미곡창고에 증축되어 있던 건축물을 제거하고, 리노베이션하여 공구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삼덕상회의 전신인 철원상회 등과 같은 북성로의 노포들로부터 천여 점에 가까운 물품을 기증받아서 전시하고 있다. 안쪽다락에는 당시 공구상들의 사무실을 복원해 두어서 현실감을 높이고 있다. 2층은 북성로 재생을 비롯한 다양한 교육과 문화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사)시간과 공간연구소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아트공방과 카페도 함께 겸하고 있다.

두 번째는 더 폴락이다. 이 서점은 2012년에 설립된 대구 최초의 독립출판물 서점이다. 원래 대명동 계명대학교 캠퍼스 부근에 있다가 북성로로 이전해왔다. 본업인 출판 외에 인디뮤지션 공연, 토크 콘서트, <아마도 생산적인 활동>이라는 소규모 페스티벌을 통해 창작자와 독자들의 직접 만남을 진행하면서 북성로의 문화플랫폼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최근에는 대구예술발전소 옆 구 전매청아파트를 개조한 청년창작공간에서 <일시적 점거: 그곳에 작은 책방이 있다>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 프로젝트는 더 폴락을 비롯한 고스트북스, 책방이층, 커피는 책이랑, 하고 책방 등과 같은 대구의 작은 서점들이 함께 기획하고 진행하며, 토크프로그램과 노래가 된 책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를 노래로’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세 번째로 cafe 삼덕상회는 알려진 바와 같이 ‘북성로 재발견’ 프로젝트의 첫 결실로 문을 연 카페이다. ‘북성로 재발견’ 프로젝트는 대구지역의 건축가, 미술가, 인문학자 10여명으로 구성되어 북성로의 근대건축물을 보존하여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문화공간으로 조성하는 사업이었다. cafe 삼덕상회의 건물은 1930년대 지어진 일본식 상가주택을 리노베이션하여 2011년 10월 27일 문을 열었다. 이 자리는 원래 1953년 철원상회라는 철물점이었고, 후일 삼덕상회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그 이름을 그대로 계승하여 과거와 현대가 공존한다는 의미를 강조하였다.
이처럼 북성로에 자리잡은 여러 복합문화공간은 출판, 교육, 체험, 휴식 등의 다양한 문화활동을 진행하고 있고, 나름대로의 특성도 지니고 있다. 이들의 존재 덕분에 북성로 거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복합문화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하겠다.

다시 길 위에 서다 – 북성로 재생에 대한 관견
북성로가 진골목이나 김광석거리처럼 대구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해결할 과제가 있다. 북성로만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다른 길과 차별성을 가진 공간으로 육성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다소 근본적인 물음이다. 북성로의 정체성 확립과 발현은 쉽지 만은 않을 것 같다. 북성로에는 두 개의 완연히 다른 시공간이 누층적으로 퇴적되어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일제강점시기 일본인이 건설한 번화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산업화시기 공구거리이다. 즉 북성로는 시간적으로는 1910~40년대와 1960~80년대가 누적되어 있고, 공간적으로는 번화가와 공구거리가 중첩되어 있다. 북성로 재발견 프로젝트의 기본방향을 근대와 현대의 공존으로 설정한 것은 이러한 시공간의 누적을 감안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것은 고려사항인 동시에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지속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이것이 북성로가 진골목이나 김광석 거리와는 완연히 구분되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요소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중적 시공간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우선 북성로에는 아직도 600여개의 공구상이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도심재생사업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생각하게 되는 일반적인 경관을 북성로에서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이는 대구의 다른 골목과는 확연히 변별되는 북성로의 정체성이라는 면을 고려하면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예컨대 김광석 거리의 경우, 방천시장 상권이 거의 쇠락한 상태에서 김광석 거리를 조성하였고, 그 때문에 김광석 거리라는 단일 정체성을 확보하는데 용이하였다. 진골목도 근대와 현대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70~80년대 진골목의 핵심을 이루던 요정이나 주택지로서의 기능은 이미 거의 소멸된 상태였다. 그래서 70~80년대의 정체성은 지우고 근대적 특성을 충분히 발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북성로는 아직도 공구상이 거리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상태이어서 근대적 요인을 발현시키기가 쉽지 않다.

존속하고 있는 업종도 문제가 되고 있다. 진골목이나 방천시장의 경우 요식업이 대부분이었고, 관광객이 몰리면서 지역민과의 협력, 상생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었다. 진골목 인근의 약전골목 역시 관광객의 증가가 한약재의 구매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근대골목사업에 협조적이다. 그러나 북성로의 주업종은 공구이다. 일반인들, 특히 관광객들의 구매욕구를 자극하기 어려운 상품들이고, 이 경우 지역민들은 도시재생에 관심이 없거나 오히려 적대적일 수 있다. 예컨대 얼마 전 중구청에서 실시한 가로 정비 및 차로의 통행조정은 상인들로부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지난 10월 23일에서 27일까지 열린 북성로 축제에서 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손으로 만드는 미래’라는 주제 하에 개최된 2017년 북성로 축제는 설정에서부터 북성로의 현대적 정체성을 담고 있었다. 특히 사람재생프로젝트를 주요한 사업방향으로 제시하면서 북성로를 지켜온 장인들의 사진과 이야기를 전시한 것은 현대적 요소인 지역민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을 통해 콘텐츠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람재생프로젝트를 발전시켜서 북성로 장인들의 이야기를 공구박물관 등에 지속적으로 전시하고, 이 이야기를 중심으로 공업전공 고교생이나 대학생들의 견학과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하면 어떨까? 장인의 거리로서 북성로의 정체성을 부각시키고, 지속적으로 관람객을 유치하며, 현재의 업종과 맥락이 통하고, 지역민들이 진정으로 참여하는 북성로 재생이 이루어 질 수 있지 않을까?

지금도 북성로에 가면 어린 시절 보았던 수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 사람들이 있었기에 북성로가 현재까지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떠난 사람, 남아있는 사람을 어떻게 다시 이 길에서 만나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이 길이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