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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 : 한국 최초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
한국 최초 여성감독 박남옥의 생애
박남옥(1923~2017)
글_서성희 영화평론가
박남옥 감독의 어린 시절
일제 강점기 관동대지진이 나던 해인 1923년, 박남옥은 경상북도 하양에서 포목상을 하던 아버지 박태섭과 어머니 이두리 사이 십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네 살이 되던 해 영천으로 이사한 뒤 아버지 박태섭은 대장간과 잡화 도매상을 운영했고 가세는 날로 번창했다. 조용했던 언니들과 달리 활동적이었던 박남옥은 항상 움직이고 뛰어놀고 달리고 그리고 무엇이든지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활발한 아이로 유년시절을 보낸다.

1930년 여덟 살이 되던 해, 대구 동인동으로 이사하고 남욱정국민학교1)에 입학한다. 이사를 간 후에도 여전히 친구들과 어울려 댕기 빠지는 줄 모르고 뛰어놀았지만 그녀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언니들 책에서 본 일본 연극·영화배우들의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2학년 때는 대구 달성공원 근처에서 살다, 다시 언덕 위에 신명학교가 있는 동산동으로 이사한다. 이때부터 동네 가게에 부탁해 영화 포스터를 차근차근 모으기 시작했다.

두 언니와 동생들, 가운데가 박남옥
박남옥은 1936년 경북여학교에 입학한다. 1학년 초 일찌감치 육상부에 들어가 가을에 열린 조선신궁봉찬체육대회(지금의 전국체전)에 참가해 높이뛰기에서 4등, 2학년부터는 투포환으로 3년 연속 우승을 했다. 운동으로 바쁜 일상 속에서도 영화 포스터와 배우들의 브로마이드, 영화의 신문광고 사진을 꾸준히 수집하는데 정신을 쏟았다. 그리고 미술책을 보는 것을 좋아해 공부와 운동이 끝난 후 이삼일에 한번 꼴로 삼덕동 파출소 근처에 있던 헌책방을 한번 둘러보고 집에 오는 습관이 있었다.

시간이 많은 날은 본정 안 골목의 헌책방인 태양당서점에 가서 시나리오, 영화잡지, 미술책을 샀다. 그 중에서 중요한 사진들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간직해 몇 박스의 유품으로 남게 된다. 그녀가 남긴 사진들은 그녀가 일찍부터 얼마나 영화와 이미지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있었는지 짐작케 한다. 비록 정규 교육으로 영화를 배우진 않았지만 좋은 그림과 영화관련 잡지를 보면서 영화에 대한 지식과 예술적 견해를 쌓으며 훗날 영화감독이 될 자양분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꿈을 안고 서울로
영화도 좋아했지만 어릴 때부터 미술 공부를 하고 싶었던 박남옥은 일본의 우에노미술학교(지금의 도쿄미술대학)를 가기 위해 서류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경북여학교는 졸업 후 여교사가 되는 내량여고사(지금의 나라여자대학) 외에는 일본의 어떤 대학의 입학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에노미술학교의 입학 관련 서류가 학교로 날아와 입학시험 한 번 못보고 이화여전 가정과에 입학하게 된다.

처음 서울에 올라와 한동안은 이화여전이 있는 신촌에서 염천교 헌책방으로 영화책도 사러 다니고, 기숙사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2학기 어느 날 사감보가 기숙사방으로 조사를 나왔다. 침대 위에 붙여둔 사진을 보며 “저 사진 뭐야! 기껏 존경한다는 사람이 영화배우야! 당장 떼!”라는 말을 들은 후부터, 그림과 영화만을 생각하며 살던 그녀는 영화배우를 존경할 수 없는 학교와 가사공부에 회의를 느끼고 조용히 가방을 들고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미술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동양화가 현초 이유태선생의 집으로 1년간 매일 출근한다. 그러다 선생이 징용을 피해 화실 문을 닫으며 그림 공부는 일단락된다.

현초 이유태 개인전 기념사진
영화계 입문은 1943년 친구 남편인 윤용규 감독의 소개로 조선영화건설본부 산하 광희동 촬영소에 들어가면서다. 그러나 대구에 계신 부모의 성화로 고향에 내려와 《대구일일신문》문화부에 입사해 영화평을 쓴다. 사실 박남옥에게 신문사 생활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일제치하 학교교육으로는 우리나라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말도 제대로 배우지 못해 철자법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영화일이 하고 싶었던 박남옥은 해방이 되자, 다시 서울로 올라와 광희동 촬영소로 들어가 「자유만세」(최인규, 1946)의 후반작업, 영화 촬영이 없을 때는 뉴스도 찍고, 「새로운 맹서」(신경균, 1947)의 스크립터로 현장에서 영화 일을 배워나갔다. 그런데 「새로운 맹서」의 제작진이 포항으로 로케이션 촬영을 가면서 스크립터인 박남옥을 데려가지 않았다. 당시 영화현장에 여자라고는 여배우밖에 없던 시절, 여자와 함께 먼 거리를 이동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관습적으로나 곤란한 일로 여겼던 것이다. 그 일로 그녀는 내심 몹시 섭섭했고 여성 영화인이라는 낯선 위치가 매우 불안했을 것이다.

박남옥의 첫사랑 김신재의 남편인 최인규 감독 집에서 크리스마스이브 파티, 가운데가 박남옥과 「자유만세」의 황려희
그 초조함과 불안한 열정을 못 다 이룬 공부로 메우기 위해서였을까 박남옥은 일본으로 몇 차례 밀항을 시도했다. 그녀가 한 번 마음먹은 일은 좀처럼 굽히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강단 있는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무용담에 가까운 그녀의 일본 밀항 모험담은 거의 코미디 에피소드처럼 웃기다가 그 시대를 함께 읽어내면 여성에게 가로막힌 억압을 뛰어넘고자했던 한 여성의 처절한 행동에 눈물겨워진다.
한국 최초 여성 영화감독 데뷔
박남옥은 1950년 6·25전쟁이 나고 대구 도청에 ‘국방부 촬영대’가 조직되자 합류해 전쟁 뉴스를 찍기 시작했다. 9·28 서울이 수복되자 육군본부 소속 100여대의 트럭이 올라갈 때 촬영대도 함께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런데 트럭에 ‘여자는 동승시키지 않는다’는 규정으로 그녀를 떼놓고 가려하자 그녀는 촬영대 대장에게 매달려 가까스로 승낙을 얻어 군복을 입고 서울로 갔다가 부산으로 피난 왔다가 하면서 이가 갈리는 모진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1953년 5월 영화한답시고 부모에게 심려만 끼치는 것 같아 효도하는 마음으로 극작가 이보라와 대구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1954년 만삭의 몸으로 서울로 올라가 그 해 6월 딸 이경주를 낳았다. 이후 이 갓난아이는 항상 박남옥의 등에 업혀있었다. 도와줄 부모형제가 대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맡길 곳도, 함께 양육해줄 가족도 없는 상황에서 아기를 업고 현장에 가야했던 진짜 고생이 시작된다.

박남옥은 서울에 올라와 200평 공지에 세트 겸해서 살집으로 판잣집을 지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제작은 생각도 못할 때 전쟁 과부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둘째 언니가 영화 만들어보라고 준 380만원으로 영화 제작을 시작한다. 그런데 제작을 시작하면서 감독에게 가장 큰 고민은 15명이 넘는 촬영팀의 점심이었다. 결국 박남옥 감독은 아침 일찍 갓 태어난 아이를 등에 업고 낙원시장에서 장보고, 밥을 해 먹인다. 남자 감독이었다면 그런 결정을 했을까하는 생각을 하면 ‘밥 하는 여자’라는 관습적 생각의 벽이 참 견고하고도 높다는 생각이 든다. 박남옥 감독은 밥하는 일에 기운을 너무 많이 빼앗겼고, 3일에 한 번꼴로 중국 음식을 시켜 점심을 해결하며 겨우 숨을 돌렸다.

고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진주로 빌려준 촬영기를 받으러 갔다가 오는 기차 안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예닐곱 시간동안 갓난쟁이 아이를 포대기에 들쳐 업고, 한 손에는 촬영기를, 한 손에는 아이 보따리를 들고 서 있었던 기억은 뼈에 사무쳤다. 그 공기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아이가 울자, 승객들이 고함을 질러댔다. “창밖으로 던지고 싶었다. 영화가 뭐길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박감독은 서둘러 여관으로 들어가 아이와 촬영기를 꼭 안고 낯선 방에서 죽은 듯이 잠이 들었다.

아이를 등에 업고 “레디고”를 외치며 죽을 고생을 다해 마지막 장면까지 촬영을 마친 후 아기를 옆에 눕혀놓고 일주일 만에 편집을 완성하고, 녹음 작업만 남겨두었다. 그런데 일이 밀려 있어 녹음 날짜를 잡아줄 수 없다는 것이다. 12월 중순부터 박남옥은 매일 공보처 녹음실로 출근해서 사정했다. 1955년 1월 6일 녹음실을 찾아갔더니 연초부터 16mm에다 여자 작품은 녹음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대부분의 작품이 16mm로 촬영되던 시절이니 필름 크기를 트집 잡는 것은 핑계고, 결국 연초부터 여자 작품이라 재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후반작업까지 마친 그녀는 최종 영화를 보던 날이 되서야 자신의 치마 끝이 갈래갈래 찢어져 있는 것을 알았다.
예술이란 개념은 그날 그녀에게는 사치였다. 여름부터 겨울까지 반년 넘도록 아이를 업고 기저귀 가방을 들고 미친 사람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촬영기재 마련, 돈 마련, 스태프 식사 마련으로 정신이 빠져 있었다.
“「미망인」 제작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예술을 논했었다.
그러나 그날, 완성된 「미망인」을 다 같이 보던 그날,
그런 것들은 더 이상 나에게 의미가 없었다.
나는 그저 속으로 울고 있었다.”
「미망인」포스터와 전단
그러나 사실 영화흥행 즉 배급과 상영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러나 영화 만드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 쓴 감독은 흥행에 신경을 쓸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녹음까지 버텨왔던 그녀의 몸과 마음 모두 피로와 건강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영화「미망인」은 중앙극장에서 4일 만에 스크린에서 내려진 후, 전국 몇몇 지역의 배급권은 팔리기도 하고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영화 만든다고 고생, 흥행한다고 아이를 들쳐 업고 전국을 헤매고 돌아다니다 그녀의 건강은 너무 나빠져 있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함께 일했던 스태프에게 생활에 보태 쓰라고 필름 한 벌을 주고 그녀는 흥행에 손을 뗀다.
다시 박남옥을 부르다
1957년 2,3월에 부모님이 대구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오자, 부모님 집으로 들어간 박남옥 감독은 결국 드러눕고 만다. 영화에 미쳐 돌아다닌 처녀 시절, 결혼, 출산, 영화감독으로의 첫출발, 흥행 실패, 이혼, 이 모든 일들을 숨 쉴 틈 없이 거치고 난 뒤의 탈진 상태였다. 계속 누워있는데 아버지가 일어나자고 하는 말에 힘을 얻어, 그길로 영화흥행 실패로 빚진 둘째 언니네가 하던 ‘동아출판사’에 1957년부터 출근하게 된다.
동경아시아 영화제에서 미후네 도로시와 김진규, 박남옥
한 이년 직장 잘 다니다 또 발동이 걸려 1959년 『시네마 팬』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1960년 4월 동경 아시아영화제 참석도 했다. 하지만 두 가지 일을 양립하기 힘들다는 것을 직감하며 결국 「미망인」이라는 영화 한 편만을 남긴 채 영화 일을 접는다. 이후 영화를 한다고 서울, 대구, 부산 등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던 생활은 기억의 한 창고에다 꼭꼭 묻어둔 채, 생활을 위해 그리고 딸을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벌고 돈을 쓰며 살았다.

“투포환 선수였던 엄마는 「미망인」이라는 포환을 던진 후 그걸 주우러 가지 않았다. 그게 어디쯤 가 떨어져 있는지 몰랐다. 좌절과 상처를 안겨준 그 포환을 던진 후, 새 포환을 던지지 못하고 엄마는 투포환장을 영영 떠났다.” – 딸 이경주 (『박남옥, 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 마음산책, 2017, 274쪽.)

한국영화계가 박남옥 감독을 다시 불러낸 것은 1997년 제1회 여성영화제를 준비하면서 「미망인」의 원판을 찾아 개막작으로 상영하면서 부터였다. 당시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되어있던 필름은 마지막 5분이 소실된 상태였지만 1950년대 전쟁미망인이라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주변 관계도를 통해 당시 여성이 처한 곤궁한 현실을 리얼리즘에 입각해 조망한 훌륭한 여성영화였다.

“여성감독이 아니면 착안하기 어려운 ‘앵글’과 사건의 ‘템포’, ‘리듬’의 명쾌, 화면과 동작(연기) 등에 생활감정을 예리하게 융화”2)했다는 개봉 직전 영화평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의 영화는 평단의 인정을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전후 여성들의 욕망을 과감하게 묘사한 그녀의 영화가 너무 앞서갔던 탓이었을까. 변재란 등의 영화학자들이 지적하듯이, 「미망인」은 단지 최초의 여성감독의 영화로 수식되기보다 여성영화로서의 의미도 큰 작품이다.

자서전 원고를 집필하는 박남옥 감독 생전의 모습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이자 의미 있는 여성영화를 만든 박남옥 감독은 2001년 임순례감독의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 : 여성 영화인이 말하는 영화」와 같은 해 김재의 감독의 박남옥을 기리는 다큐멘터리영화 「꿈」(2001)을 통해 자신의 생애와 열정을 영상으로 남긴다. 그리고 서울여성영화제는 2008년 진취적인 활동을 하는 한국 여성감독에게’박남옥영화상’을 제정해 수여했다. 그 해 「우리생애 최고의 순간」을 감독한 임순례감독이 수상했다.

한국 최초 여성감독 박남옥은 2017년 4월 8일 미국에서, 영화촬영현장에서도 한시도 떼어놓지 못하고 등에 업고 다니던 딸 이경주 가까이서 생을 마감한다. 2017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이었던 고(故) 박남옥을 기리기 위해 ‘박남옥 영화상’을 부활, 제정했다.

“나는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
우리나라 여성 영화인들이
좋은 작품을 만들고
세계로 진출하는 것도 보고 싶다.”
  • 1)박남옥이 기억하는 남욱정국민학교의 정식명칭은 대구남욱정보통학교로 대구시청과 염매시장 사이에 있었다. 1937년, 학교는 비산동으로 이전하면서 대구공립서부보통학교로 개명하고 지금의 대구서부초등학교가 된다. <大邱南旭普校(대구남욱보교) 新校落成在邇(신교낙성재이) 오는九月一日移轉(구월일일이전)>, 《동아일보》, 1937-08-15, 4면.
  • 2)<未亡人(미망인) 女監督(여감독)·朴南玉作(박남옥작)>, 《동아일보》, 1955-02-27, 4면.
<참고자료>
  • 본문 중 ” “안의 글과 사진은 따로 각주를 단 것을 제외하고는 박남옥 감독의 자서전에서 직접 발췌한 내용이다. 박남옥, 『박남옥 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 마음산책, 2017.
  • 『전후의 풍경』, 「미망인」, 「꿈」이 담긴 DVD세트, 한국영상자료원, 2011.
  • 주진숙, 변재란 외, 『여성영화인 사전』, 소도, 2001.
  • 김종원 외,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 김선아, <아이콘이 된, 한국 최초 여성감독 박남옥의 삶>, 《중앙일보》, 2017.04.25.
  • 「박남옥」, 『근현대영화인 사전』, 동의대학교 영상미디어센터.
  • 「박남옥」, 『다음백과』.
  • <大邱南旭普校(대구남욱보교) 新校落成在邇(신교낙성재이) 오는九月一日移轉(구월일일이전)>, 《동아일보》, 1937-08-15.
  • <메가폰 든 여성들 ① : 아이 업고 촬영장 진두지휘…한국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 《여성신문》, 2017-10-25.
  • <未亡人(미망인) 女監督(여감독)·朴南玉作(박남옥작)>, 《동아일보》, 195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