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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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커처 에세이
대구예술의 힘 : 한국 최초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
한국의 첫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
글_김현정 영화감독
2017년 4월,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으로 주목받았던 박남옥 감독이 95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서른둘 나이에 「미망인」이라는 단 한 편의 영화를 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인으로서 그녀의 삶의 행적은 많은 자료를 통해 알려졌다. 하지만 1955년 그녀가 활동했던 당시에는 영화는 부진한 흥행 성적으로 고작 사흘간에 상영 후 막을 내려야했고, 그녀와 그녀의 영화가 다시 빛을 본 것은 무려 40여년 후의 일이었다. 그동안 한국영화에서 잊혀 진 고인은 한 영화학도의 석사논문에서 등장했고, 1997년 제1회 서울여성영화제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으로서 「미망인」이 개막작으로 선정되며 재조명을 받게 되었다.

‘최초’라는 단어에는 영광과 함께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충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특히 영화를 만드는 행위는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영역뿐 아니라 육체적이며 세속적인 영역도 상당히 크다. 한국 최초의 여자 감독이라는 타이틀은 이러한 영화 제작 전반에 걸쳐서 마주했을 수많은 벽을 상상하게 만든다. 실제로 박남옥 감독은 영화 제작비를 번듯한 제작사가 아닌 자신의 친언니에게 구했고, 촬영을 진행하면서 영화를 찍는 일보다 돈을 구하러 다니는 일에 더욱 급급했다. 또한 1954년에 첫 딸을 출산한 그녀는 촬영 기간 내내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다녔으며, 배우와 스태프의 밥값을 아끼기 위해 아침에 시장을 보고 미리 점심을 준비해놓고서야 영화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박남옥 감독이 여성 감독으로서 겪었던 고충을 대표하는 일화가 있다. 6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우여곡절 끝에 영화를 찍고서 드디어 후반 작업을 진행하게 될 무렵, 그녀는 녹음기사로부터 새해 시작부터 여자의 작품을 해주면 재수가 없다며 작업을 거절당하고 만다. 이처럼 여성 감독에게 살얼음판 같았던 1950년대 영화판에서 기어코 완성하고야 만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은 마치 세상의 편견과 장애를 무수히 맞서온 그녀와도 매우 닮아있다.

박남옥 감독의 유일한 작품인 「미망인」은 죽은 남편의 친구에게 후원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여자 신이 주인공이다. 친구의 부인이 이를 질투하게 되면서 다른 남자인 택과 불륜을 저지르고, 택은 우연히 바닷가에서 놀던 신의 아이를 구하면서 신과 가까워진다. 결국 신은 자신의 딸을 버리고 택과 동거를 시작하지만, 끝내 택이 전 애인을 만나 신을 버리게 되면서 신은 택에게 크나큰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비록 우연이 거듭되는 플롯과 자극적인 치정 관계, 과장한 연기 등은 지금 우리에게는 다소 유치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1950년대 한국영화에서 여성의 욕망을 이토록 솔직히 다룬 작품은 매우 드물다는 점에서 「미망인」은 작품으로써의 가치 또한 높이 평가할만하다. 지금 세대까지도 여성은 여전히 희생과 모성애를 강요받고 있으며, 여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쉬이 무시당한다. 게다가 여성들의 성적 욕망은 늘 금기시되고 되레 저급한 것으로 취급당하기 마련이다.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에서는 그러한 여성들의 억눌린 욕망을 과감한 영화 장면과 이야기 등으로 깨트리고 해방시킨다. 제목 그대로 주인공 신은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지만, 제 운명에 그저 슬퍼하지 않고 어떻게든 삶의 끈을 붙잡으려 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운명적인 사랑이 다가왔을 때 영화는 그녀의 사랑을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욕망에 방해가 되는 딸을 버리고 사랑을 나누는 과감한 선택을 시도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신이 사랑에 빠진 남자가 전 연인에게 돌아가면서 끝내 그녀의 사랑이 끝내 이뤄지지 못하게 되지만, 영화는 정절을 지키지 못한 그녀를 탓하는 것이 아닌, 짓궂은 운명에 칼을 휘두르고 자신만의 삶을 찾기 위해 떠난 그녀의 빈자리를 비추어 줄 뿐이다.

박남옥 감독은 「미망인」을 완성한 후 4년가량의 결혼 생활 끝에 남편 이보라와 이혼을 하게 된다. 영화 「미망인」의 제작, 연출, 배급까지 일련의 일을 손수 맡으며 고군분투했던 박남옥 감독은 당연하게도 육아와 가사에 매진할 수 없었고, 그것이 박남옥 감독과 남편 이보라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든 원인으로 보인다. 영화로 인해 남편과의 가슴 아픈 이별을 경험하고 더욱 쇠약해진 건강으로 지쳐있던 박남옥 감독은, 거기서 무너지지 않고 「시네마팬」이라는 월간 영화지를 창간한다. 이처럼 박남옥 감독은 영화감독으로써 뿐만 아니라, 개인사적으로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었던 매우 단단하고 강한 여성이었다.

박남옥 감독은 1923년 경상북도 하양에서 10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이후 경북여학교에 재학하여 투포환 선수로 조선신궁봉찬 체육대회(현 전국체전)에 출전해 3회 연속 한국 신기록을 수립하는 등 운동선수로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녀는 미술학교로 진학하려 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이화여전 가정과에 들어갔다가 결국 중퇴하고, 다시 도쿄에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낡은 목선을 타고 밀항을 하다 배가 좌초하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식민 시대와 해방, 6‧25전쟁과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고스란히 겪어온 박남옥 감독은 대구 매일신문사에 문화부 기자로 입사해 영화평을 집필하고, 1945년부터는 조선영화사 촬영소에서 편집을 배우고, 이후 신경균 감독의 영화 「새로운 맹세」에 스크립터로 참여하게 된다. 전쟁 기간에는 한형모 감독을 따라 국방부 촬영대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등 박남옥 감독의 일생 행보는 거침이 없고 매우 도전적이었다.

박남옥 감독의 삶은 늘 영화와 함께했다. 한 가지에 사로잡히면 오롯이 그것에만 몰두했다는 박남옥 감독은, 비록 영화감독으로는 단 한 편의 영화에만 참여했지만, 전 생에 걸쳐서 영화와 관련된 일을 꾸준히 해왔다. 부모님의 권유로 이화여전 가정과에 다녔을 때조차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온종일 영화를 보고 감상평을 썼다는 박남옥 감독은 한국의 첫 여성 영화감독이라는 타이틀이 정작 스스로에겐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영화를 위해 열정적으로 현장을 누비는 그녀의 모습은 수많은 남성 스태프들을 설득했고 그녀의 노력은 여성 감독이 아닌, 그저 한 명의 영화 연출자로 인정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박남옥 감독에 대한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는 그녀가 대구지역 출신의 감독이라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경산 하양에서 태어나 네 살 이후 영천으로 이사를 했고, 그녀가 국민학교 2학년이 될 무렵 대구의 달성공원 근처로 다시 이사를 했다. 박남옥 감독이 이혼 후 가족들이 거주지를 모두 서울로 옮기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다. 여성 감독이 전무했던 시대에 탄생한 첫 여성 영화감독이 서울 출신이 아닌 지방 출신이라는 점은, 당시 한국전쟁으로 인해 어수선했던 시대 배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서울, 인천, 대전 등 대다수 도시는 파괴되었고, 흥남부두에서 미군 군함을 타고 내려온 이북 피난민들을 포함해 많은 연극‧영화배우들 또한 부산으로 피난했다. 어느덧 부산은 영화 연극인들의 집합소가 되었고, 당시 기자로 활동했던 박남옥 감독 또한 그들과 많은 교류를 가지며 피난 도시인 부산에서 영화를 만들 궁리를 했다. 휴전설이 나돌던 1953년, 박남옥 감독은 그해 5월 이보라 작가와 결혼을 하게 된다. 신첩 살림을 부산에서 차린 박남옥 감독은 이듬해 딸을 순산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전쟁미망인’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주변 친구들과 의기투합을 한다. 그때까지도 서울은 폐허가 된 채 복구되지 않은 상태였고 영화 기재 또한 구하기도 힘들었을 때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박남옥 감독은 주변인들과 함께 영화 제작의 뜻을 꿋꿋이 밀어붙였다. 이 일련의 과정은 박남옥 감독이 품고 있었던 영화에 대한 의지와 신념을 보여준다. 대다수의 영화인들이 전쟁으로 인해 영화작업을 잠시 내려놓고 있는 것과는 상반되게 박남옥 감독은 전쟁 그 자체를 화두로 삼아 그것을 영화로 완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다. 당시 극작가였던 남편 이보라가 미망인을 소재로 시나리오를 쓰고, 박남옥 감독은 촬영기자재부터 시작해서 영화 작업의 전반에 걸쳐 진두지휘를 하였다. 그렇게 완성된 「미망인」으로 한국의 첫 여성 영화감독이 탄생했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돼 있던 「미망인」의 원판은 그 마지막이 훼손된 채 복원되었다. 복원된 총 75분의 러닝타임 중 마지막 10분에는 영상의 음성은 나오지 않으며, 이후 5분가량의 장면은 아예 유실되었다. 박남옥 감독의 자서전에 따르면, 없어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되어 젊은 남자와 한때 연민을 느끼기도 한 주인공 신이 결국 아이를 데리고 꿋꿋이 살기 위해 리어카에 짐을 싣고 이사를 떠난다는 내용으로 매우 공을 들여 찍었다고 한다. 영화는 마치 그것을 만든 이의 인생을 예견하듯이, 박남옥 감독은 남편 이보라와 이혼한 뒤 외동딸인 이경주를 홀로 키우며 영화잡지를 창간해 20여 년 동안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여생을 딸과 함께 미국 LA에서 보내게 된다. 영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었던 그녀였지만, 열악한 제작환경과 시대적 한계에 떠밀려 두 번째 작품은 만들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여성으로서 감독 데뷔의 기회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녀의 삶의 행보는 오늘날 끊임없이 쏟아지고 쉽게 사라지는 수많은 영화와 감독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