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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4
불확실성한 시대, 불확실한 연극의 그 놀라운 가치
글_박근형 연극인
지금은 모두가 힘들어 하는 시대다.

힘들다는 것은 공동체의 전망과 미래가 막연하다는 얘기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 개개인의 삶이 참으로 미약하고 비참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란, 세대와 가치 지역을 떠나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두를 말한다. 불확실성의 오늘을 사는 우리는 미래의 비전을 기대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현실유지도 힘들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로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는 영혼이 메마른 사람들이다. 먹고 살기도 매우 버겁다. 주머니에 신용카드 몇 장 씩 있지만, 신용카드 독촉장 역시 다른 주머니에 가득하다. 매일 매일 돈 걱정으로 수심 가득하다. 돈이 없으면 영혼은 메마른다. 가난한 시대, 도시의 허울 좋은 버스정류장에서 첨단의 미리알림 시스템을 이용하여 집으로 돌아가지만, 매달 월세를 내기위해서 그만 둘 수도 없는 업무에 치여 돌아간 집은, 과거의 전리품마냥 허술하기 짝이 없다. 네온사인은 우리들에게 그저 거품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 거품 아래 모여 휴식을 찾고, 모두가 커피 중독자처럼 매일처럼 일회용 커피 컵을 들고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살고 있다. 커피 잔에 중독된 우리는 우리의 어설픈 취향에 젖어, 포털 검색어를 장식하는 문화 정치 연예인 이야기를 화재삼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촉을 세우기도 하고, 틈만 나면 박스오피스 영화 얘기를 하기도 하면서 친구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영화를 보고 다니기도 한다. 열렬히 영화를 비평할 땐 어느 순간 내가 영화의 관계자나 평론가가 된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래서 그 순간만은 행복하다. 지방 출신, 어느 무명배우의 성공담으로, 그 배우의 가슴 아픈 일화로 그날 화재의 피날레를 장식한다. 잠시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현실을 망각하고 그렇게 오늘도 유쾌한 하루가 지나간다. 그런 일상이 보통의 사람들의 나날이다.

‘프렌즈’ 제2회 대한민국연극제 웰메이드전 중

그러다 우리는 생각한다. 밤늦은 시간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시간이거나, 아니면 아침이 되어 숙변의 고통을 이겨야 하는 출근 직전의 그 순간이거나, 그 어느 때 이던지 혼자가 되면 현실이 다시 우리 앞에 저벅저벅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가 한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연극 얘기를 해 보자.

삶이 윤택해질수록 예술애호는 증가한다. 애호가들이 증가할수록 문화는 점점 산업화되어간다. 예능과 예술이 산업화 되어갈수록 표현의 다양성도 확장되고 관객 뿐 아니라 창작자의 수효도 증가한다.   천만이 한 영화를 보고, 안방에서는 바다 건너온 미드와 중국드라마를 동시에 구매해서 즐길 수 있다. 새로운 형식의 실험과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첨단의 영상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고 순수예술의 영역에서도 융합을 시도하는 여러 실험들이 선보인다. 영상과 미술 연극이 혼합되고, 강연과 쇼가 연극과 버무려져 무대 위에 올려 진다. 첨단기술의 발전이 시각적 효과를 문화로 소비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문화는 형식의 새로움, 문법의 독창성에 정신을 쏙 빼앗긴다. 그 순간이 지나면 무엇을 보았는지 잘 기억나질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낡지 않은 것, 고리타분하지 않은 것이다. 적어도 미래의 문턱에 발을 들여놓은 듯 뿌듯하다. 시간의 사생아가 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듯 예술의 속성은 늘 미래에 그 소실점을 맞추고 있다. 연극을 위시한 순수예술들도 전화기나 책처럼 멸종되지 않기 위해 그 자체의 생존방법을 모색하듯 미세하지만 다양한 실험의 양상을 조금씩 반영하고 있다.

한편, 형식표면의 변화에 아랑곳없이 내러티브만을 고수하는 과거의 기수들은 미래의 연금술사들의 탄생에 벼랑 끝에 선 듯 위태롭다. 이런 현상들은 늘 있어왔다. 세대를 막론하고 시대의 부끄러움과 불안을 다루는 예술가들에게 표현은 자신의 영역을 경계 짖는 하나의 수단일 뿐임을 서로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다양할수록 부딪치고 그런 만큼 상생한다는 것도.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건만 서로 간의 반목양상을 좀 더 불안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다양성이 가져온 혼돈 때문이며 그 혼돈의 기저에는 미래의 불투명성에 대한 가치의 불안 때문이다. 가치의 불안이란, 우리가 어떤 것이 옳다고 판단하는 순간에도 그 가치는 변하고 있다는 뜻이다. 답이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다양해진 예술형식애호의 변화는 특정한 창작에 특수를 누리게 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순수영역에 몰입하는 예술제작 현실을 어지럽힐 수도 있다. 연극이 그 중 하나일 것이다. 공동창작을 기본으로 하는 연극의 제작과정의 열악함은 상대적으로 산업화된 예술의 격상을 무색하게 만든다. 열의에 차 시작했던 순수 예술의지는 어느 순간 공허함과 마주친다. 일단 먹고살아야지 꿈도 꿀 게 아닌가,

 연극을 한다.

허전한 주머니와 마음의 결핍을 채울 그 무엇을 찾으려 고민한다. 혼미한 세상,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고 싶다. 결핍이 가득한 사람들이 모여 빈약할지언정 뼈대를 세우고 여기저기 살점을 붙이고 뚫린 구멍을 채울 진흙을 궁리한다. 예산을 궁리한다. 예술적 실험도 하고, 관객과의 소통도 하고, 돈도 좀 벌면 좋겠다. 적자를 감수할까? 예산이 더 필요하다. 예산을 줄 수 없다고 한다. 포기할까?

그 미래는 내 밥그릇과 깃발 사이에서 갈등한다. 갈등의 양상은 점점 깊어간다. 논쟁은 깊어가고, 오해는 또 다른 오해를 낳고 반목한다.

마음은 풍찬노숙, 독립군이 되고 싶지만 군자금 조달과정이 순조롭지 않다. 여럿이었을 때 ‘무엇’이었던 결기는 각자가 되어 집으로 가는 길에 흩어진 불티처럼 허약하다. 주머니가 허전하다. 미래를 담보로 저당 잡힌 현실이 공허하다. 그 미래마저도 옳은 것인지 모호하다면 말이다. 현실과 마주치는 절망의 순간이다. 대구 문화 얘기기도 하지만, 서울에 비하면 불모지인 지방도시 문화 이야기다.

이렇듯 평범한 나와, 예술을 하는 나는 불안이라는 같은 현실을 살아 내고 있다. 막연히 예술의지로 희망을 수놓아 보지만, 예측하기 힘든 미래가 막막하다는 면에서 그 둘은 쌍둥이와 같다.

하지만 불완전하다는 것이 완결이 덜 된 것이 아니라 완결로 진행하고 있는 것의 다른 의미인 것처럼, 불확실성이란 확실성에 대한 다른 성찰의 암시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가령 우리가 깨진 거울을 들고 있을 때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은 그것이 깨져있다는 걸 적어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알고 있는 나는 바로 과거의 시간에서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시간까지의 함축된 역사다. 그런 의미에서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연극을 한다는 것은, 삶이 당면한 불확실성의 또 다른 자아다. 커피, 등산복, 버스정류장, 낡은 집, 재생, 융합을 거쳐 실험에 이르는 다양한 얼굴로 당장은 혼돈스러울 수 있지만, 이럴 때 일수록 세대 간의 차이를 이해하고 내 밥과 네 밥을 서로 양보하며 신뢰를 회복해야한다. 역사를 반추하는 거울을 바라보며 인간의 인간됨을 되새겨 보려는 것이 바로 연극정신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극한환경의 비즈니스라는 기사에서 사이언스지에 실린 그린란드 상어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 최근 500년을 넘게 살았을 가능성이 있는 이 상어는 매우 느린 성장속도가 수명을 늘린 원인 이라 한다. 그것은 혹독한 자연생태를 극복하기위해 고래 스스로 신진대사를 낮춘 결과이고, 깜깜한 심해에서 먹이를 구하는 방식으로 기생충과의 독특한 공생관계를 맺는데, 자신의 눈 조직을 먹으며 실명시키는 기생충의 몸에서 발산되는 빛으로 유인된 먹이를 먹으며 추운바다의 최강 포식자가 되었다는 사연이었다. 이렇듯 결핍은 불확실성이란 극단의 상태에 또 다른 생존전략으로서 위대한 자산이 되기도 한다.

사람이 하는 연극도 마찬가지다. 부족한 현실이 받쳐주지 않고 팡파레도 들리지 않는 안개 속을 더듬대는 것, 그것이야말로 연극정신의 본질에 접근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형식은 내용을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이다. 우리가 내용에 필사적으로 매달릴 때 새로운 형식은 저절로 탄생한다. 혼돈스러움과 결핍, 독립운동 하는데 군자금타령 하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 연극은 정신이다. 그러니 연극환경에 있어 이 불확실함이야말로 연극의 미래고 십자가인 것이다. 시대가 불확실해 질수록 연극은 역사를 호출한다. 연극정신은 불확실한 시대가 호출한 성찰된 역사의식이다. 깨진 거울로도 깨뜨릴 수 없는 인간의 삶이다. 게다가 혹독한 환경에서 태어난 예술의 혼은 개인의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바꿀 수 있다. 그것을 잊지 말자.

연극은 세상 그 무엇가도 바꿀 수 없는 혼자만의 떨림이다. 불확실한 이 세계를 진정으로 바로 쳐다보는 미지와 혼돈의 현실을 뛰어넘는 마법의 현장이다.

그리하여 가소로운 불확실의세계여, 어서 어서 더 우리에게 다가 오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