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것은 대회 참가자들이 20대가 다수라는 것, 심지어 10대 고등학생도 있었고, 초등학생도 있었다. 치열한 예선 경쟁을 뚫고 본선에 오른 열 팀 남짓의 예비 뮤지션들도 대부분 20대, 그들은 나름대로 김광석의 노래를 해석하고 새롭게 편곡해 무대에 올랐다. 경기도 안산에서 온 4인조 밴드는 기타와 멜로디언, 퍼쿠션을 연주하며 ‘나의 노래’를 흥겹게 불렀고, 스무 살 동갑내기 듀오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애절하게 노래했다. 18살 고등학생 듀오가 통기타를 치며 ‘서른 즈음에’를 부를 때는 관객석에서 박수와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이들에게 김광석은 그들 세대의 가수가 아닐진데, 어떻게 김광석의 노래를 이처럼 맛깔나게 노래할 수 있었을까?
대중가요의 리메이크 열풍은 노래가 이야기를 만나면서 뮤지컬로 재해석되기도 한다. 뮤지컬 <광화문 연가>는 작곡가 이영훈과 이문세가 만들어낸 주옥같은 발라드가 끝없이 흐르고, 김광석의 노래를 뮤지컬로 만든 여러 작품들이 수년째 무대에 오르고 있다.
TV드라마와 영화 OST에도 복고풍의 리메이크 노래는 강력한 인상을 남긴다. <시그널>은 장현, 펄시스터즈, 산울림의 노래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드라마의 서사를 강화했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는 90년대와 80년대의 노래들이 그 시절의 풍경과 정서를 자극한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의’풍문으로 들었소’ <수상한 그녀>의 ‘나성에 가면’처럼, 요즘 한국영화에는 예전에 높은 인기를 누렸던 가요의 리메이크 버전이 약방의 감초처럼 삽입되고 있다.
텔레비전 음악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에서는 아예 한명의 레전드급 뮤지션을 세워두고 그의 음악을 통째로 리메이크하기도 한다. <나는 가수다> <수퍼스타 K>와 같은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리메이크는 필수다. 물론 이 프로그램들에 등장했던 곡들은 음원 시장에서도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대중문화계의 이러한 현상은 리메이크 송이 일정 정도의 흥행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곡의 히트를 장담할 수 없는 시장에서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인기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친숙한 음악의’다시 부르기’인 것이다. 90년대처럼 음반이 백만 장씩 팔리는 시절도 아니고, 대형 공연의 성공도 장담할 수 없는 지금과 같은 불황에, 리메이크 송만큼 매력적인 것이 없다. 투자에 비해 리스크가 높은 대중문화의 특성상, 창작자와 투자자들은 새로운 도전과 모험을 시도하기보다는 과거의 유산으로 수익의 불확실성을 낮춰가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도 이러한 흐름에 별 거부감 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호응하고 있다. 옛 노래가 새로운 옷을 입고 TV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자, 대중들은 그 노래와 함께 했던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지금보다 젊었고, 힘이 넘쳤고, 무모한 사랑과 희망을 이야기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이 노래만큼이나 나의 청춘도 아름답고 찬란했다고 생각한다. 무릇 사람은 자신의 청춘을 가장 좋은 시절로 기억한다. 불안하고 어설펐지만 가장 순수하고 빛나던 시기로, 말 그대로 참 좋은 시절이었던 것이다. 같은 이유로, 그때 들었던 대중가요가 최고의 음악이 된다. 리메이크 송의 인기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노스탤지어가 노래로 구체화되는 순간, 사람들은 그 곡에 다시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레트로와 노스탤지어의 시대는 현재의 불안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사방을 둘러봐도 무엇 하나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미래를 설계하기보다는 과거를 곱씹으며 추억하고, 모험을 감행하기보다는 안전한 다시감기를 단행하는 것이다. 대중문화는 한 시대의 사회적 풍경과 공기를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2010년대의 복고주의는 결국 한국사회 전반에 내려앉은 불확실성에 기인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미국의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저서 <불확실성의 시대>를 발표하면서, 현대사회의 특징은 ‘불확실성’이라고 규정했다.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든 확신을 갖고 신봉할 지도 원리나 철학이 있어왔고 그것은 모든 판단과 선택의 기준이 되어왔는데, 현대에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갤브레이스가 지적한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 모두에 해당한다.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지시등을 켜지 못한 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이 불안하고 허무한 것은 바로 현재의 불확실성 때문일 것이다.
불안한 현재는 복구주의를 소환하지만, 젊은이들이 이를 자기 식으로 해석하고 새로운 창작물을 세상에 내놓는다. 김광석을 다시 노래하는 청년들이 그러했듯이, 소스는 부모 세대에게서 가져온 것이지만 자기 세대에 맞는 감수성으로 다양한 대중문화 상품을 만들어내고 이를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시대를 대변할 새로운 문화를 만들지 못하고, 과거의 것을 재활용한다고 탓할 필요가 없다. 레트로에 기댄 청년들의 문화 역시 지금 그들의 내면 풍경이니까.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청년들은 미래를 계획하기 쉽지 않다. 얼어붙은 취업시장과 불안한 노동시장, 점점 낮아지는 혼인율과 저출산 등으로 미래가 불투명한데, 먼 앞날을 가늠해 뭔가를 도모한다는 게 무의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청년들은 멀리 보기보다는 지금, 이곳을 응시한다. 지금을 즐길 수 있고, 현재의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것에 더 집중하는 것이다. 동네 골목 한 곳에 자리 잡은 복고풍의 가게들에서의 체험을 이를 반증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를 단순히 구경하고 소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가 창작자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바느질을 하고 가방을 만들고, 예쁜 글씨를 배우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만들고, 직접 만든 빵과 맥주를 장터에 내놓기도 한다. 즐기고 소비하던 것을 직접 창작함으로써 소비자와 생산사, 작가와 독자의 경계가 사라지는 현상들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훗날 사람들에게 회자될 대단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의 나를 표현할 최상의 문화행위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기성세대에게 김광석의 노래가 어떤 의미인지, 그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김광석의 노래가 좋은 이유들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노래를 내 방식으로 다시 불러보고 싶을 따름이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자기 세대의 문화를 만들어간다. 이들 세대의 풍경이고 문화인 것이다.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명제는 어느 것 하나 선명하지 않은 우리 시대의 어두운 면은 대변한 표현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또 다른 창작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문화는 늘 그런 방식으로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스스로 서는 법을 모색하고 공유하면서 그 시대를 건너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