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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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독립·예술영화전용관의
자율성과 공공적 영역
글_ 최태규 대구경북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
2년만의 재휴관, 그리고 재개관
지난 2017년 6월 25일 지역 예술영화전용관 동성아트홀은 충격적인 공지문을 SNS에 개제하였다. 경영악화를 이유로 다음날인 6월 26일부터 잠정중단 및 휴관을 선언한 것인데, 2015년 4월 1일 재개관한 이후 만 2년만의 운영중단 선언이었다. 이후 내부직원들의 증언에 의하여 밝혀진 사실은 이번 기습적인 휴관은 단순 경영악화의 이유가 아닌 사측과 직원들과의 내부갈등, 그로인한 권고사직 종용으로 증폭된 것이라 전했다. 또한 대표자의 비상식적인 노동관을 질책했다는 이유로 당시 공지문에 <동성아트홀>이라는 명칭을 영화계에 양도하겠다는 표현을 쓰는 등 그 갈등이 마치 영화인과 비영화인으로 나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의 민낯이 철저하게 공개되어버렸다.
그런 한바탕 소동이 있은 후 동성아트홀은 휴관 약 한 달만인 7월 20일에 재개관을 선언하였고, 이번 사건으로 드러난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해명도, 사과도, 해결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헌신적으로 일했던 기존 직원들이 전원 교체되었다는 것과, 몇몇 독립영화 배급사들의 보이콧이 현재에도 이어지며 한국독립영화 수급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쯤하면 예술영화전용관이 아닌 재개관전용관이 아니냐는 비아냥도 흘러나올 법한 현실이다.
동성아트홀(출처_동성아트홀 페이스북)
지난정부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핵심사례
지금도 포털사이트를 통해 동성아트홀을 검색하면 현재 재판중인 지난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핵심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특검의 공소사실에 의하면, 지난 2014년 김기춘 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천안함 프로젝트와 같은 정부 비판적 영화를 상영한 영화관에 대하여는 불이익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고, 이 지침에 따라 영화진흥위원회는 심사기준까지 바꿔가며 동성아트홀 등 5개의 예술영화전용관에 대한 지원을 배제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바라보았던 동성아트홀이라는 곳은 독립·예술영화를 상영하는 곳이 아닌 반정부 영화를 집중적으로 상영하여 국민을 선동하고, 국가전복의 의도가 다분한 종북집단 쯤으로 해석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최근 배우 문성근, 방송인 김미화 등이 포함된 82명의 MB정부 블랙리스트에 까지 필자를 포함한 대구지역의 4명의 영화인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영화계, 더 나아가 문화예술계 전체를 향한 날선 사상검증이 비단 2~3년 사이에 만들어지고 관리된 게 아니라는 것이 지금에서야 밝혀지고 있다.
재개봉관 동성아트홀의 기적
동성아트홀의 이야기는 배사흠 전 대표로 부터 시작된다. 배 전 대표는 대구 만경관 등에서 영화 간판을 그리는 일을 시작으로 영화관을 운영하고자하는 꿈을 키워왔다. 마침내 1992년 그의 전 재산 3억 원을 투자하여 대구 최초 소극장인 ‘푸른극장’을 인수하게 되었고, 이를 ‘동성아트홀’로 명명하면서 극장운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부터 대기업들이 영화제작 및 상영, 배급시장에 뛰어들었고 막대한 자본을 무기로 한 멀티플렉스가 대세가 됨에 따라 지역 복합상영관 역시 멀티플렉스의 체인점으로 간판을 바꿔달기 시작했고, 이에 단관극장들은 점점 쇠퇴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에도 동성아트홀은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것은 운영비용을 줄일 수 있는 가족경영 덕분이었는데 배 전 대표가 매표를 하고, 지금은 고인이 된 아내가 매점을 운영하고, 장애인인 아들이 영사를 하면서 재개봉관, 비디오전용극장, 제한상영관으로 그 명맥을 이어왔다.
그러던 2004년. 당시 대구경북독립영화협회 남태우 전 사무국장은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를 안정적으로 상영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물색하다가 동성아트홀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그의 권유에 의해 예술영화전용관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만남은 ‘단관극장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감동적 성과를 이뤄냈다. ‘동성아트홀릭’이라는 2만여 명의 인터넷 커뮤니티 회원들이 자기 일처럼 뛰어들어 극장의 회원제를 만들어내고, 재능기부를 통해 그저 칙칙하기만 했던 대기공간의 인테리어를 미술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또한 올빼미영화제 등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 공간으로서의 동성아트홀을 만들고자 수시로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였다. 무엇보다 배 전 대표 가족의 휴식을 위해 매달 하루씩 극장을 대신 지켜주는 활동까지 펼쳐내는 등 그 미담이 확산되면서 관객은 차츰 증가하였고, 전국적인 모범사례로 손꼽히는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또한 2014년 대구경북독립영화협회는 전국 유일하게 예술영화전용관, 독립영화전용관이 있는 대구를 꿈꾸며 독립영화전용관(현 오오극장) 설립사업을 펼쳐나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꿈은 정권의 시린 칼날 앞에 철저하게 무너지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블랙리스트 영화관의 지원배제 이후 그나마 버텨오던 동성아트홀의 운영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월세마저 내지 못할 처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오극장이 개관하고 얼마 있지 않은 2015년 2월 25일. 급기야 동성아트홀은 폐관의 길로 향하게 된다.

1. 진입계단(2008년)

2. 영사실(2006년)

3. 대기풍경(2005년)

4. 상영관(2006년)
만우절의 거짓말처럼 다시 돌아온 동성아트홀
2015년 4월 1일. 거짓말처럼 동성아트홀이 다시 돌아왔다.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나버린 장국영의 영화로 재개관 기획전이 구성되고, 낙후된 시설을 개선하는 리모델링 공사도 예정되는 등 새로 시작하는 동성아트홀의 기쁨을 알렸던 것이다. 대구에서 화상전문병원을 운영하며 평소 동성아트홀 사태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던 김주성 현 동성아트홀 대표가 극장을 인수하게 된 것이다. 또한 배사흠 전 대표의 아들이자 장애가 있는 영사실장(지금은 교체된)을 포함 기존 운영인력 전원을 고용승계하면서 지역사회의 무한한 박수를 받게 된다.
재개관 초기 김 대표는 공식발언을 통해 예술영화보기 캠페인 시행 등 문화예술경영에 대한 높은 기대를 드러냈으며, 정규상영시간 외에는 영화애호가들에게 동성아트홀을 무상으로 개방하겠다는 공공성까지 강조를 해왔다. 무엇보다 관객들은 깨끗한 화장실, 그리고 한층 편안해진 극장의자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가 관객들에게는 너무 편하게만 다가왔을까. 상영정보가 극장 홈페이지를 통해 공지가 되면서 끈끈했던 ‘동성아트홀릭’이라는 관객스스로 만든 커뮤니티는 자연스럽게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그 사이 김 대표가 자혜롭게 승계한 기존 인력과도, 김 대표 본인이 새롭게 채용한 인력과도 적지 않은 마찰이 있었을 것이다.
급기야 지난 6월 25일은 지역사회의 많은 응원을 받으며 호기롭게 시작한 동성아트홀의 비극이 불과 2년이 지난 시점에서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재개관한 동성아트홀(출처_동성아트홀 홈페이지)
표현의 자유, 그리고 공공성

동성아트홀 대표는 본 글의 처음에 언급한 최근 일련의 사건들이 단순 해프닝이었다고 그칠 수도 있다. 또한 동성아트홀의 조직형태가 개인사업자로 존재하기에 어느 누구도 대표자의 자율권을 훼손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지속적인 운영을 위해 국가보조금과 시비보조금이 투입되었다는 것은 그 목적에 대해 공공성이 담보된다는 암묵적 동의가 존재한다는 사실과도 같다. 이것은 동성아트홀이 합리적으로 운영되고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하는 공공재의 특성과 잇닿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갈등이 터져 나온 정황이 어떻게 되었건 민주적절차로 해결되어야 될 문제를 ‘왜 남 일에 참견 하냐? 동성아트홀 명칭 버릴 테니 가져가라’ 식의 태도를 보인 것은 지금껏 동성아트홀을 아끼고 사랑하고, 그리고 금전적 후원도 마다하지 않았던 관객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 동성아트홀이 얽힌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블랙리스트로 핍박받은 동성아트홀의 이야기며, 하나는 동성아트홀 스스로가 드러낸 치부에 관한 이야기다.
무엇이 동성아트홀의 본 모습인가?
친정부영화, 반정부영화를 떠나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는 당연히 존중받아야한다. 지역의 독립·예술영화전용관이 ‘무엇을 상영 하는가’에서 ‘어떻게 상영되어 지는가?’로의 관심의 전환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