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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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 : 성악가 ‘김금환’
대구 오페라계의 초석, 테너 김금환
글_박창민 작곡가/현대작곡가동인 소리유희 대표
한국 최초의 가곡 ‘동무생각(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이 1922년에 작곡되어졌다. 가사 중에 대구의 ‘청라언덕’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우리 대구의 서양음악 역사를 알게끔 해주는 대목이 있어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거의 100년에 가까운 역사다. 분야를 바꾸어, 대구에서 오페라라고 하는 순수음악 장르가 정착된 지가 거의 50년이 되어간다. 당시 대구의 오페라와 오페라협회의 시발점이 되어준 인물들에는 이점희, 하대응, 이기홍, 김금환, 홍춘선, 남세진, 안종배, 임우상 등의 인물이 있다. 본고에서는 ‘테너 김금환 선생’의 생애와 음악적 활동에 대해 크고 중요한 몇 가지 업적을 간략하게나마 다루어 보고자 한다.

1919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출생한 그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형제들 중 유일하게 월남하여 피난 생활을 하였고, 남한에서 자리를 잡는 동안 경제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음악가로서의 길을 택하여, 당시 서라벌예술대학1)을 졸업하였다.
1956년부터 1967년까지 약 12년간 국악사양성소(國樂士養成所)에서 양악 강사를 역임하였고, 1957년에 비로소 전문성악가로서의 독창회를 개최하게 되고 이를 필두로 하여, 1959년 4월에는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에 출연하였으며, 같은 해 6월에는 한국연주가협회(韓國演奏家協會)의 종합공연에도 출연하였다.

고 김금환 선생은 1960년대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시기는 서울지역이 주 무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각각 열거해 보자면, 1960년 5월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1962년 4월 국립오페라단 단원으로서 작곡가 장일남(張一男)의 창작오페라 “왕자호동”, 1963년 5월 베르디의 “가면무도회”, 1964년 푸치니의 “토스카”, 같은 해 6월 도니체티의 “루치아”, 그리고 11월 푸치니의 “토스카” 공연 때 주역으로 출연하였다. 그리고 1965년 5월 5일~14일과 6월에는 국립오페라단이 주최한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 공연에, 그리고 11월에 베르디의 “아이다” 공연 때 출연하였다. 또한 이듬해 1966년 10월에는 장일남의 창작오페라 “춘향전”에 출연하였으며, 1968년 10월 1일에는 국립중앙극장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이들 시기 중 1962년부터 2002년 타계할 때 까지 국립오페라단과 국립극장의 종신단원으로서 활동하였다. 또한 1967년에는 대한일보사 주최의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김금환 (사진출처_영남일보 기사)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는 국제적인 활동과 유학 그리고 대학교수로서의 활동이 시작된 시기인데, 1971년에 영남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정식교육기관에서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하였으며 1980년에는 같은 학교에서 음악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1985년 퇴임할 때 까지 후학양성과 지역음악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교육자로서의 시기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던 1969년부터 72년까지 일본의 후지와라 오페라단의 단원으로서, 1972년부터 2002년까지 일본 니끼카이 오페라단의 단원으로서 국내와 일본에서 최고의 가수로서 호평을 받았으며 많은 오페라에 출연하여 주역을 맡았다.
그는 당시 다소 늦은 나이라 할 수 있는 50세 때 비로소 유학을 시작하였는데, 이때가 1969년의 일이다. 이 무렵 동경예술대학 대학원 오페라과에 유학하여 콩쿠르 입상과 더불어 일본 동북지방 일대 순회공연과 오페라, 독창회 등 많은 연주활동을 하였다. 이후 10년이 지난 1979년도 즉 교수로서의 활동시기였던 이 무렵에도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짤츠부르크에 유학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음악 본고장의 음악적 상황과 음악현장에서의 많은 경험과 선진음악경영 등을 체득하고 배우하면서 틈틈이 연주활동을 하였다. 그 시기의 연주활동 중에는 특히 짤츠부르크의 라히 방송국이 주최한 독창회를 들 수 있는데, 이 날 공연 프로그램을 한국 가곡만으로 구성하여 많은 이의 주목을 받았고 그 연주실황이 현지에 그대로 방송되어 음악 본고장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도 하였다.

1970년대의 음악적 활동은 아마도 우리 대구음악사에서도 큰 획을 그을만한 일들이 많이 있었다. 우선 그의 연주활동에 대해 살펴보자면, 1970년 5월 푸치니의 “라보엠” 공연에 출연하였고, 같은 해 9월 11일에 일본의 이등경자(伊藤京子)와 함께 조인트 리사이틀을 개최하였다. 이듬해 즉, 영남대학교 사범대학의 교수로 부임하게 된 1971년 3월에는 푸치니의 “토스카”에 출연하였으며, 1972년 10월에는 푸치니의 “투란도트” 공연에, 그리고 같은 해 11월 16일에는 대구에서의 첫 독창회를 열었다. 그리고 1973년 3월 31일에는 광주에서 독창회를 열었고, 같은 해에 11월 베르디의 “아이다” 공연에서 주역으로 출연하였다. 더불어 1974년 9월 베르디의 “오델로” 공연 때 출연하였고, 12월 2일 부산시향 공연 때는 협연자로서 출연하였다.

지금까지의 끊임없는 경력들이 말해 주듯, 그가 활동한 1970년대는 성악가로서 이미 50을 넘어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오늘날의 30대와 40대의 정상급 성악가들보다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마 현재의 어느 젊은 그들일지라도 선생의 열정과 활동 앞에서는 비교하기가 쉽지 않으리라 본다. 이점이 바로 그에 관한 음악사적 중요성과 성악가로서의 역량을 판단하기에 충분한 중요한 기준이 되어 준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무엇보다 선생이 지니고 있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 오늘날 어떠한 음악인도 그에 대해 가부를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의 후기 활동에 대해 계속해서 언급하자면, 당시 영남대학교 사범대학 성악과와 기악과 학과장이었던 당시 즉 1975년 5월에는 비제의 “카르멘” 공연에 출연하였으며, 그리고 그의 나이 57세가 되던 해인 1976년 10월 16일~18일에 바그너의 “로엔그린” 공연을 주역으로서 출연하였다. 또한 영남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으로 재직 중이던 1980년 5월 13일 세종문화회관 소강당과, 그리고 그 이듬해 1981년 9월 25일 부산시민회관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계속하여 64세가 되던 1983년 4월 9일 안동문화회관에서, 곧이어 5월 3일 포항시민회관에서, 그리고 5월 12일 울산 현대여고에서 독창회를 열었으며, 11월 15일에는 영남대 대명동 강당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이어 65세가 되던 1984년 6월 4일~5일 푸치니의 “토스카” 공연과 이듬해 즉 영남대학교 교수로서 퇴임하던 해인 1985년 4월 15일~16일 대구 영남오페라단의 “라보엠” 공연 때 주역으로서 출연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5일 「테너 이인범 12주기 기념음악회」 때, 마지막으로 10월 27과 28일 대구 영남오페라단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에 출연하였다.

김금환(1919-2002)
일일이 망라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그의 연주활동을 통해 테너 김금환의 음악적 역량을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우리에게 남긴 더욱 값진 그의 업적에 대해 언급하자면, 바로 그가 영남대학교 교수가 되었던 1971년에 ‘대구 오페라협회’를 창단하였다는 것이다. 이 때 그는 초대 회장이 되었고, 이점희, 하대응, 이기홍 선생을 고문으로 모시면서 당시 경북여고 교사로 재직 중이던 임우상2) 선생이 사무국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1973년에 대구 오페라협회의 창단연주회가 개최되었으며, 이 공연이 바로 대구 최초의 오페라라고 할 수 있는 ‘토스카’이다. 김금환 선생은 이 공연의 연출을 담당하였다.
이후 1984년 영남오페라단을 창단하여 초대단장을 역임하였으며, 그로부터 10년 후 김귀자 단장3)이 현재까지 이끌고 있다. 선생은 이후에도 많은 작품을 연출하고 출연하였으며, 후진을 양성하는데 혼신을 기울였으며, 2002년 별세하였다. 고 김금환선생의 이러한 열정으로 인해 현재 대구의 오페라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데 밑바탕이 되었다 할 수 있다.
당대 그의 제자들은 말한다. ‘제자들이 감히 쳐다 볼 수도 없었던 분이셨고. 특히 오페라를 많이 사랑하셨고, 그 오페라 속에 가수가 지녀야 할 덕목을 제자들에게 아낌없이 가르쳐 주셨으며, 그 중에서도 연기에 대해서는 철저하면서 확고한 신념을 지니셔서 선생님께 오페라 교육을 받을 때에는 발동작 하나까지 세심하게 지도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당대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오페라 개척을 위한 그의 열의는 대단하였으며, 음악적 사고가 확고하면서 후진들에게는 엄격하신 분이었으며, 주위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하든지 자신의 음악세계가 확고하였고, 그러한 것들을 후학들에게 전수하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그 만의 철저함으로 당시 한국 최고의 테너가 될 수 있었고, 어느 누구도 선생의 흠을 잡을 수 없었다.’그리고, “선생님은 레슨 때 아주 엄하셨고, 특히 수업시간을 철두철미하게 준수하셨다.”라고 그의 제자 중에는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고(故) 김금환 선생의 타계 이후 그를 위한 추모음악회가 지역 성악인들을 중심으로 열리고 있다. 2005년 4월 8일, 그를 위한 추모음악회가 대덕문화전당에서 열렸는데, 당시 남세진선생을 추모음악회 추진위원장으로 하여 김귀자, 정기진, 박영국, 손정희 등의 위원을 비롯하여 20명의 음악인이 참여하였다. 2013년 5월 7일에는 대구 아양아트센터(관장 김형국)에서 ‘5월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선생의 제자들과 지역의 성악인 그리고 피아니스트로 활동 중인 그의 손자 김신준씨가 참여하여 추모음악회를 열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행사라 여겨진다. 앞으로도 선생뿐만 아니라 지역음악계의 초석을 다진 분들을 기리는 행사는 전공과 분야에 관계없이 아낌없이 치러져야 된다고 본다.

또한 이 글과 더불어 ‘대구음악관의 설립’의 이유와 그 중요성을 힘주어 강조하고자 한다. 필자가 짧은 지문에 피력한 이러한 내용들이 큰 의미 없이 글로만 읽혀 질 것이 아니라 우리 대구의 서양음악의 1세대와 2세대 등 역사를 이루고 만들어 온 많은 존재들의 포스터와 프로그램을 포함한 각종 공연홍보물과 녹음, 녹화 및 보도자료 등을 한 건물 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장소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는 자라오는 후진들과 애호가 및 대구시민전체에게도 그들을 알게 해야 되고 또한 더 알려야한다는 소명의식도 포함되어 있다. 역사를 안다는 것은 뿌리를 안다는 것이다, 그것은 미래의 방향을 설정하고 계획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글을 집필하기 위해 음악전문잡지 ‘음악춘추’의 2014년 6월호의 기사와 검색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사전’의 일부를 참조하였음을 밝혀둔다.

  • 1)현재의 중앙대학교.
  • 2)저자 박창민의 스승, 현재 계명대학교 작곡과 명예교수
  • 3)성악가, 경북대학교 음악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