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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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커처 에세이
대구예술의 힘 : 성악가 ‘김금환’
김금환, 대구오페라 운동의 선구자
글_손태룡 음악이론가, 대구문화재단 이사 / 캐리커처_권용훈
오페라 가수 중에서도 테너 성부를 가진 성악가가 청중들에게 더욱 더 직접적인 호소력을 가진다. 그것은 높은 음을 나타내기 때문일 것이다. 테너 성부에서도 선율을 더욱 서정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아마도 리릭 테너가 제격일 것이다. 1970년대부터 30여 년간 우리곁에서 함께 음악활동을 하였으나 그 가치를 잘 드러내지 못한 리릭 테너가 바로 김금환(金金煥, 1919-2002) 선생이다. 그는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 중 화가 카바라도시가 부른 「별은 빛나건만」을 즐겨 불렀다.
「별은 빛나건만」의 애창자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1919년에 출생한 김금환 선생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혼자 서울로 남하하였다. 그는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어릴 적 성당에서의 음악소리를 잊지 않았다. 서울에서 1953년에 개교한 서라벌예술초급대학(이후 서라벌예술대학 – 중앙대학교)을 다녔으며, 연세대학교 성악과 이인범(李仁範, 1914-1978) 교수를 사사하였다. 이인범은 한국오페라협회를 창설하고 국립오페라단의 초대 단장을 지낸 우리나라 오페라계의 초석을 닦은 인물이다.
김금환 선생은 이인범 선생의 지도에 의해 오페라 가수가 되었다. 1956년에 처음으로 독창회를 개최한 그는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에서의 양악(서양음악) 강사를 하면서 생활하였다. 아울러 1962년부터 스승이 단장으로 있는 국립오페라단에서 1972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2002년 사망할 때까지 국립극장 종신단원이었다.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15년간 수많은 오페라에 출연하여 자신의 기량을 드높였다.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1959. 4),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1960. 5), 장일남의 <왕자호동>(1962. 4), 베르디의 <가면무도회>(1963. 5), 푸치니의 <토스카>(1964), 도니제티의 <루치아>(1964. 6), 푸치니의 <라보엠>(1965. 5. 5-14), 베르디의 <아이다>(1965. 11), 장일남의 <춘향전>(1966. 10) 등 많은 오페라에 주연배우로 출연한 바 있다. 이러한 경험이 나중에 대구에서의 오페라 운동에 바탕을 이루게 된다.선생은 이미 1955년 창단된 순수 민간오페라단인 프리마오페라단 단원으로 초창기 한국오페라 무대를 누볐으므로 한국오페라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당시 조상현, 오현명, 안형일, 황영금, 이인영 등과 함께 활동한 미성의 리릭 테너인 김금환 선생은 1960년대 안형일과의 쌍벽을 이루었으며, 소프라노 황영금과 짝을 이루어 오페라 무대를 장식했다. 한국 최정상의 테너였던 선생은 1970년대에는 일본 최고의 오페라단인 후지와라오페라단(1969-1972)과 니끼카이오페라단(1972-2002) 단원으로 오페라 주역을 맡아 활동하였다. 또한 대만 정부 초청으로 대만 최초의 오페라 푸치니의 <토스카>를 연출해 국빈대우를 받기도 했다.
1956년 첫 독창회 이후 두 번째 독창회는 서울 국립중앙극장에서 1968년 10월 1일에 가졌다. 곧 그는 오페라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일본 동경예술대학 대학원 오페라과에서 공부하고 졸업한다.(1970년) 서울로 돌아온 선생은 푸치니의 <라보엠>
(1970. 5)에 출연하는 등 더욱 오페라에 심취하게 된다. 아울러 일본인 소프라노 이토 교코(伊藤京子)와 조인트 리사이틀(1970. 9. 11)을 하였다. 이렇게 서울과 일본에서 왕성한 오페라 활동을 하면서 3번째 독창회를 가진 그는 영남대학교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오페라의 씨앗을 뿌리다

영남대학교 음악과에 1971년 부임한 김금환 선생은 서울에서 활동한 것같이 대구에서도 오페라와 독창회를 통한 음악활동을 지속한다. 당시 대구에는 오페라단이 없었다. 그래서 지역 음악인과 함께 오페라를 할 수 있는 단체를 결성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대구오페라협회이다. 오페라협회에서는 오페라를 제작 공연할 수 있는 전초전으로 ‘아리아와 중창의 밤’을 개최하였다. 1971년 10월 7일 제1회 공연을 시작으로 출발한 것이다. 대구오페라협회는 1974년부터 대구오페라단으로 개칭하고, 자체적으로 오페라를 제작하기 위해 대구 최초의 민간오페라단이 되었다.

김금환 선생은 푸치니의 <토스카>(1971. 3)를 시작으로 여럿 오페라를 계속 연출 감독하게 된다. 푸치니의 <투란도트>(1972. 10), 베르디의 <아이다>(1973. 3. 31), 베르디의 <오텔로>(1974. 9), 비제의 <카르멘>(1975. 5), 바그너의 <로엔그린>(1976. 10. 16-18) 등이 그것이다. 아울러 1972년부터 3년간 연속 독창회를 가졌다.(1972. 11. 16; 1974. 9. 대구), (1973. 3. 31. 광주). 당시 1973년 6월 대구MBC가 주최한 대구오페라협회의 <토스카> 공연은 특기할만한 일이었다. 이는 기성인의 본격적인 오페라로서는 대구에서 최초였다.
선생은 한국오페라 운동의 열정을 서울에서 고스란히 대구지역으로 옮긴 것이다. 1971년 대구오페라협회를 창단하여 초대회장을 맡으며, 5회의 ‘예행적 아리아의 밤’을 열었다. 또한 1974년 대구오페라단 창단공연으로 대구 최초의 오페라인 푸치니의 <토스카>를 무대에 올리기에 이르렀다. 이후 푸치니의 <쟌니스키키>를 마지막으로 총 15편의 작품을 남겼다. 한편 선생은 1979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방송국 주최로 한국가곡만으로 독창회를 개최하여 방송된 바 있는데, 당시 한국가곡만으로 독창회를 가졌다.

1980년부터는 자신의 독창회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세종문화회관(1980. 5. 13), 부산시민회관(1981. 9. 25), 안동문화회관(1983. 4. 9), 포항시민회관(1983. 5. 3), 현대여고(1983. 5. 12), 영남대(1983. 11. 15) 등에서 독창회를 가진 것이다. 그리고 1984년부터 1994년까지는 영남오페라단 단장을 역임하는 등 평생을 오페라교육에 이바지 하였다. 창설된 1984년 그해 6월 4-5일 푸치니의 <토스카>를 무대에 올린다. 영남오페라단은 매년 2회에 걸쳐 정기공연을 가졌으며, 포항・구미 등에서 오페라 공연을 가져 지역오페라 공연 활성화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라보엠>(1985. 4. 15-16),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1985. 10. 27-28)를 비롯하여, <일 타바로>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1990. 4. 4-5)를 동시에 무대에 올리기도 하였다. 단장인 김금환 선생이 연출을 맡았으며, 바이얼리니스트 박석출이 지휘하는 대구청소년교향악단, 대구여성합창단과 성악가 28명이 출연하여 완성하였다. 대구에서 활동중인 성악가들이 출연하여 각기 개성이 있는 배역으로 연기를 펼친 이 공연에 선생은 “원전에 충실하여 음악(성악)부문에도 신경을 쓰고 있지만은 연기에 특히 충실하여 극적 효과를 솔직하게 보여줄 생각”이라고 연출의도를 밝혔다.

그리운 사람, 김금환

선생에 의해 창설된 영남오페라단은 1984년 6월 4-5일 창단공연으로 바이얼리니스트 심상균의 지휘와 선생의 연출로 <토스카>를 공연하였다. 대구오페라협회로 시작한 대구오페라단의 활동과 영남오페라단의 영향으로 이후 대구시립오페라단이 창단된다. 대구시립오페라단은 1992년 10월 8일 김완준 초대단장을 중심으로 창단연주회를 개최한 단체이다. 1989년 10월 확정한 향토문화발전 10개년 계획의 적극 추진에 의하여 창단된 것이다. 이렇듯 대구시립오페라단이 설립되는 분위기를 바로 선생의 대구오페라단과 영남오페라단의 활동에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김금환 선생은 ‘대구오페라 운동의 선구자’, ‘한국오페라사의 한 획을 그은 대구오페라계의 선구자’, ‘대단한 오페라 가수’, ‘연기력이 매우 뛰어난 오페라 가수’, ‘위대한 성악가’, ‘오페라를 사랑한 가수’ 등으로 지칭되고 있다. 또한 선생은 오페라 가수가 지녀야 할 덕목으로 ‘연기 철저’, ‘확고한 신념’, ‘세심하게 지도’, ‘전문 오페라 연출’, ‘오페라 개척’, ‘음악적 사고가 확고’ 등 후진에게 엄격하여 당신만의 음악세계가 분명함이 그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이유이다.

선생은 생애 전체를 독창활동을 비롯하여 수많은 오페라와 함께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삶이 지금까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성품과 이북에서 내려온 점으로 묻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1970년대부터 대구지역에서는 서서히 오페라에 관심이 대두되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김금환 선생은 대구지역 오페라를 활성화 시킨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선생의 오페라 활동을 높이 평가받아 대구시에서 수여하는 제8회(1988년) 대구시문화상(공연)을 수여받았다.
김금환 선생이 사망한 이후 그의 음악정신을 기리는 ‘추모음악회’가 이듬해인 2003년 영남대학교 음악대학 졸업생으로 구성된 천마성악회가 주최하여 열린 바 있다. 또한 2005년 4월 8일에는 <고 테너 김금환 교수를 기리며>라는 타이틀로 대덕문화전당에서 ‘그리운 우리가곡의 밤’이 영남오페라단과 대구성악협회 주관으로 선생이 생전에 애창했던 한국가곡을 중심으로 추모음악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2013년 5월 7일에는 아양아트센터에서 ‘5월의 노래’로 추모음악회가 있었다. 앞으로 매년 선생을 기리는 음악회가 개최되기를 바라며, 아울러 오페라 공연에도 함께 하기를 바랄 뿐이다.

<참고자료>
  • 유족이 제시 및 제공한 내용.(2017년 8월 13일).
  • 추모음악회 팜플렛(대덕문화전당_2005, 아양아트센터_2013).
  • 『대구문화』. 대구:대구문화예술회관, 1990, 4월호.
  • 『매일신문』. 대구:매일신문사, 2013, 5월 6일자.
  • 『음악춘추』, 서울:음악춘추사, 2013, 6월호.
  • 『한겨레음악대사·한겨레음악대사전』. 송방송. 서울:보고사, 상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