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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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interview
대구 1세대 남성 무용가 김상규
내가 기억하는 김상규 선생님
인터뷰이_이숙재
인터뷰어_박민우
박민우 :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이 인터뷰는 김상규 선생님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교수님과 함께 활동하고 배웠던 제자의 입장에서 김상규 선생님을 기억하는 제자로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김상규 선생님과는 어떤 인연이신가요?

이숙재 : 1922년생, 올해 96세로 선생님은 원래 무용을 하셨던 분은 아니셨고요.
아버지가 안동 김씨의 장남이셨는데, 아버지가 김상규 선생님을 1935년에 일본에 유학을 보내시게되었대요. 유학을 보낼 때는 법관이 되기 위해서 였답니다. 일본 와세다 대학 법학과와 동경전기학교에서 3년동안 수학한 후 1944년 한국으로 귀국하셨습니다. 근데 선생님이 무용하게 된 동기는 조택원과 최승희의 무용을 보고 감동을 많이 받아서 일본으로 가자마자 동경 전기학교에 다니시면서 조택원과 최승희가 공부한 “이시이 바쿠”라는 세계적인 무용가의 무용 연구소에 들어가셨대요.

이때부터 꿈을 키우고, 그 후 졸업해서 “김상규 무용연구소”를 차리게 되었어요. 일본에서 전기학교에 나왔으니 한국 귀국후 한국전력공사에 취업을 했었으나 무용에 대한 꿈을 못 버리고 한국전력공사에서 김상규신무용연구소라는 간판을 내고 낮에는 직원으로 일을 하고 밤에는 의자를 치우고 무용 연습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연구소에 들어가서 춤을 배우기 시작했죠. 제가 5살 정도 되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하고 연을 맺어서 춤을 배우게 되었는데요. 그때 영화배우 이빈화씨나 유명하신 분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제1회 김상규의 춤이 1949년에 만경관에서 발표를 하셨고 이후 2회.. 계속해서 13회 발표회 까지 하셨어요.

워낙 선생님께서는 테크닉보다는 정신적인 차원을 중시하셔서 시는 글자를 통해서 생각을 발표하고 음악은 음계를 통해 발표하고 춤은 자기 생각을 몸으로 표현하는거다! 그러므로 춤은 생각을 키워야 한다고 많이 주장을 하셨습니다.

수업하기 전에는 항상 30분씩 명상시간을 가져서 정신교육을 시키고 이론 강의를 굉장히 철저하게 가르쳤어요. 그때는 제가 어려서 잘 이해하지 못하였고 장난도 치고 벌도 섰던 기억이 나는데요. 1952년 2회 발표회부터 선생님과 같이 공연을 했었어요. 선생님과 듀엣도 하고… 등등 그때부터 고등학교 18살 이화여대 갈 때까지 선생님 밑에서 제자로서 무용을 했죠. 그래서 선생님과 인연을 맺은 거죠.

제자 중에서는 제가 현대무용가로서 활동을 하고 있고 거의 대부분의 제자는 지금 활동을 안 하고 있는 분들이 많다 보니까 선생님에 대한 업적이라든가 조명이 안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당시에만 해도 송범, 임성남씨가 있었다 하더라도 선생님만큼 활발하게 활동을 하지 않으셨어요.

김상규의 작품 활동 중에서
박민우 : 그럼, 대구에서는 선생님이 어떤 분들과 활동을 하셨나요?

이숙재 : 선생님이 대구에서 교류하던 예술인들을 말하자면 서상일, 김춘수, 이윤수, 박대일, 윤장근, 박양균, 남세진, 문권, 김대한, 이동희, 김희원 등 이런 분들과 저녁마다 모여서 토론하시고, 시인이라든지 미술, 문학 분야 분들과도 굉장히 깊은 유대관계를 맺으셨어요.
대구에 내려와 계셨던 조재훈, 구상, 모윤숙, 유치완, 이용도, 마해송 등 이 같은 문인들을 비롯해서 시를 가지고 무용활동을 많이 하셨어요. 그런데 요즘 말하면 굉장히 선구화된 선생님이셨던 것 같아요.

‘춤’이라는 것이 예쁘게 잘 추면 된다고 대다수 사람들은 생각을 하는데요. 원래 ‘춤’이라는 것이 발레처럼 기량만 계속해서 닦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예능인과 예술가를 비교해서 어떤 것이 더 낫고 나쁘다는 것은 없지만 예능인이라면 배우라든지 플레이어하는 분들 즉 피아니스트,무용수 등등. 반면에 예술가는 창조하는 사람 즉 안무가, 영화감독 및 연출, 작곡가, 미술가, 문인 등 직접 창조하는 분들을 예술가로 칭하면서 선생님 께서는 저희들을 예술가로 키우기 위해 많이 노력하셨던 분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조택원, 최승희씨는 고유한 우리나라 신무용이라는 것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바꿔서 추는 거에요. 무엇을 나타내기 위해 춤을 추는 것인가? 관객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는 것인가..라는 부분에 대해 선생님은 굉장히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처음에는 무용가가 춤을 예쁘게 잘 추면 되는 것이지 그게 무슨 뜻인지를 저도 잘 몰랐어요. 대다수의 무용하는 분들이 다 모르고 시작 했을 겁니다. 근데 제가 뉴욕대에서 공부를 하다보니 공부의 과정이 그당시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더라고요.

선생님은 예술가가 되려면 “내 생각을 앞서가는 눈으로 그것을 춤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예술가의 소명이다.”라고 늘 생각을 하시는 분이였기 때문에 그 시대의 무용가들과는 다르게 시대를 앞서 가시는 것 같았어요.

박민우 : 선생님 작품 이야기도 들을 수 있을까요?

이숙재 : 선생님의 작품은 3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의 삶과 주변의 환경을 표현해서 만든 작품들, 두 번째는 전통적인 문화 민족성을 다룬 작품, 세 번째는 굉장히 불교를 깊히 공부 하셔서, 심오한 종교성과 사상을 다룬 작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회귀>라는 작품을 출품하셔서 제1회 대한민국 무용제에서 우수상을 받으셨어요.

선생님은 <산하>라는 작품을 끝으로 1989년 세상과 하직하셨습니다. 급성 폐결석으로 떠나셨는데요.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격언을 몸소 실천하여 자기 삶속에서 보여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김상규
박민우 : 마지막으로 두 분이 서로 애피소드 같은 것이 있었나요?
이숙재 : 어릴 때부터 저를 많이 예뻐하셨어요.(웃음) 선생님은 늘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는데요. 저를 항상 뒤에 태우시고 집에 바래다주셨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6·25때 납치 되신후 선생님은 제 아버지와 같은 분이셨어요. 저와 함께 다니면서 늘 하셨던 말씀이 항상 앞을 보고 꿈을 가져야 한다 하셨고, 제가 앞으로 무용계에 큰 획을 그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으며, 너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자주 해 주셨어요. 알게 모르게 그 말씀들이 저에게 큰 힘이 되었었습니다. 굉장히 남다른 이쁨을 받았었는데요. 하지만 제가 보답을 못 드린 것 같아 죄송한 마음 뿐입니다.
1996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후원을 받고 미래춤학회에서 준비한 학술세미나에서 ‘우리춤의 선구자를 말한다’라는 원고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점은 자료를 보관하고 있던 (고)김소라 교수의 집이 갑작스러운 화재로 인하여 많은 자료들이 소실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흩어져 있던 자료들을 모으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으며 그의 무용사적 업적이 높이 재평가 될 수 있도록 제자중의 한사람으로써 소임을 다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