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커처_김선정
사진_국립현대미술관
1942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해방 직전에 가족과 함께 귀국하였던 그는 농부이면서도 서예, 목공 등의 방면에 손재주가 뛰어났던 부친을 닮아 미술에 재능을 보였고, 능인중학교와 대구공고를 거쳐 홍익대 회화과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무척이나 가난했던 그가 예술가로서의 미래를 꿈꾸는 일은 녹록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학업 도중에 건축과로 옮김으로써 스스로 주류예술가들의 그룹에서 소외되었고, 다시 활동무대를 대구로 옮기면서 이른바 ‘중앙’에서도 멀어졌다. 말하자면 그는 거의 미술계를 떠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결정에는 ‘그동안 배운 서구식 교육의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각성이 한몫을 했다. 그즈음에 그는 “우리나라의 모든 교육이 서양문명의 모르모토에 불과”했으며,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진짜 자신을 찾기 위해 정면승부하는 수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대구에서 박현기는 한편으로는 건축업을 영위하며 또 한편으로는 자신만의 수행에 착수했다. 그런데 그 ‘여행’은 놀랍게도 전통과 자연, 그리고 그 반대편의 첨단기술 문명을 종단하는 것이 되었다.
먼저 전통과 자연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는 시골의 여러 문중(門中)과 향교(鄕校), 사찰과 박물관을 찾아다니며 선조들의 미의식을 탐구하였는데, 대구 근교 화원(花園)의 문씨집성촌의 종가집에서 알게 된 (당시 80대로 추정되는) 노인에게 자주 찾아가서 민족의 전통에 대한 강론을 듣기도 하였고, 골동품을 수집하며 옛사람들의 미학에 대해 배우고 반추했다. 또 특히 수석에 관한 관심은 아무 형상도 찾을 수 없는 자연석에서 생명의 응어리진 기억을 읽어내고자, 또 그 내면과의 소통에 집중하는 태도로 이어졌고, 그래서 자연석은 다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거울이 되었다. 80년대 박현기의 설치 혹은 퍼포먼스를 보면 그가 자연석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 장면을 지켜보았던 차남 고(故)성범씨는 이렇게 회고하였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박현기는 발가벗은 채 등에 ‘I AM NOT STONE’이라 쓰고 돌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일종의 반어법으로써 돌과 자신 사이의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일체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한편, 박현기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기가 비디오아트와 백남준을 알게 되면서 찾아왔다. 그는 1974년 여름 며칠간 미국문화원에 며칠간 다니면서 백남준의 작품인 <지구의 축>(1973)과 머스커닝햄의 춤을 편집한 싱글채널비디오를 보았다. 여기서 그는 ‘비디오신디사이저’로 제작한 새로운 비전의 영상에 매혹되었다. ‘바보상자로만 생각했던 TV가 예술의 수단이 되다니! 그는 백남준처럼 그 ‘첨단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곧 한계에 부딪혔다. KBS 대구방송국의 주조실에서 비디오신디사이저를 보았고, 백남준의 실험적 기술이 이미 상업 레벨에서 사용 중임을 알고, 그러니까 자신이 원하는 첨단테크놀러지는 이미 손이 닿지 않는 영역에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작가노트. 1984)
그는 현실과 비현실,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 선상에서 그것들 구조화하는 예술가가 된 것이다. 이러한 전개는 그가 건축가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를테면 그는 가상과 실재를 엮어 새로운 구조체를 만드는 구성주의자였다. 이윽고 1978년에 그의 유명한 ‘돌탑비디오’가 탄생하였고, 1981년의 <도심지를 지나며>라는 이벤트를 보면 트레일러에 실린 (거울이 부착된) 큰 바위가 대구시를 가로지르며 도심을 반영하고 기억하는 주체 혹은 미디어라는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작품세계를 세세히 살필 여유는 없으나, 평론가 마야 다미아노비치(Maia Damianovic)가 ‘일종의 의식의 매트릭스’라고 불렀던 90년대 후반의 작품 <만다라>도 사실은 ‘돌에 내재한 기억의 소용돌이’가 다른 형식으로 드러난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그는 미술계를 떠나 건축쟁이로 재야에 있었고, 상파울로 비엔날레 초대작가로 세상에 알려졌으면서도 생전에 국내의 예술계는 그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으며, 평생 미술대학 등에서 특강 한번 초청받은 적이 없었다. 어느 면으로 보거나, 박현기는 한국의 제도권 미술계가 키워낸 작가라고 할 수도 없고, 오로지 과묵한 수행으로 자신의 세계를 발견하고 수단을 모색하였으며 그것들을 독창적으로 구축했던 미디어아트의 대가(大家)라고 할 수 있다.